1차시 - 임시정부와 독립군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대립
1)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대한민국 임시 정부
- 1919.3.1 독립운동 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해 온 이승만, 여운형, 김구 등에 의해 중화민국 상하이에 수립되었음
3.1 독립 운동
- 독립 운동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내외 각지에서 정부 수립 계획이 진행되었음
-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결집
- 임시의정원을 설립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각료들을 선출, 임시헌장을 제정
1919.4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을 선언
- 비슷한 시기에 서울,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상하이 임시 정부로 통합
2) 임정의 활동과 내부 대립
1919.6 임정 내무총장으로 안창호 취임
- 연통제(한반도 내부와의 비밀 연락망) 조직화 -> 한반도의 독립 운동과 해외의 독립 운동 연결
- 기관지 '독립 신문' 발행
- 각종 홍보활동 전개
임정은 내부적으로 대립 등이 표면화 되었음
시베리아파 | 상하이파 | |
안창호의 민력양성론 파 | VS | 이동휘 등의 즉전즉결론 파 |
이승만 | 안창호 |
안창호 - 힘을 키워서 싸워야 한다.
이동휘 - 바로 싸워야 한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결렬
- 지도자들 간의 대립으로 1923년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어 세력이 약해짐
3) 이승만 탄핵
이승만 국제 연맹에 의한 한반도 위임 통치를 제안
- 독립 달성을 위해 위임 통치라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생각 (1945년에도 신탁 통치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음)
- 그러나 임정 내에서 이동휘 등의 강한 반대에 부딪힘
1925년 이승만은 탄핵을 받아 이후 사실상 김구가 수반
2. 독립군의 활동
1) 3.1 독립 운동 후의 무력 투쟁 재편
1919년의 3.1 독립 운동 후 비폭력 운동의 한계를 느낀 세력이 여러 개 그룹으로 결집
만주 지역 동부 간도에 결집하여 무장 투쟁을 벌임
- 간도 지방은 산림 지대가 많고 조선 왕조 시대로부터 다수의 농민들이 이주한 지역
- 1920년쯤 약 50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거주
- 조선 총독부의 직접 지배를 받지 않아 대한제국 말기에 항일 의병 투쟁을 벌인 의병들이 활동을 계속하는 땅이 되어 있었음
1919년 3.1 독립 운동으로 궐기한 조선인들이 새롭게 합류했음
간도 지역에 많은 항일 무장 조직이 결성
2) 봉오동 전투
1920.6.7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봉오동 계곡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 19사단과 남양 경비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임 -> 큰 승리를 거둠
일본군의 피해
사망 150여명, 부상 10명
독립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음
- 항일 투쟁에 있어서의 첫 번째 완전한 승리
3) 청산리 전투
일제는 봉오동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컸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음
- 1920.10
중국 : 중국인 마적이 혼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 혼춘 사건이 일어남
일본 : 간도 일대에 수만 명의 대부대를 보내 대규모로 간도 항일 무장 조직 진압 작전에 나섰음
청산리 전투
- 1920.10.21 ~ 26에 걸쳐 만주 간도의 청산리 부근에서 조선의 항일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 독립군의 지도자는 홍범도, 이범석, 김좌진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큰 성과를 올렸음
일본군의 피해
- 조선 독립 운동 지혈사 : 사망자 900~1600여명
- 대한 민국 정당사 : 사망자 1000여명
- 한국 전쟁사 : 사상자 3300명
청산리 전투에 대해 일본 측은 극히 작은 피해였다고 하고 봉오동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음
- 이러한 사실은 일본이 피해 규모를 축소하려는 의도로 판단됨
- 일본 측 핵심 논리는 일본은 한국(조선)과 전쟁한 적이 없다는데 있기 때문
- 혹시 일본이 한국(조선)과 전쟁을 했다면 일본은 한국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
4) 자유시 참변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 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면서 간도 지역에서 소탕 작전을 벌였음
독립군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밀산(중국 흑룡강성의 도시)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
대한 독립 군단
- 동쪽으로 이동하여 연해주의 이만에 집결
러시아 자유시에서의 움직임
-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문창법 그리고 자유대대를 이끄는 오하묵은 러시아 붉은 군대와 협의,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국 독립군을 자유시에 집결시켜 조직을 통합하려고 했음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들이 자유시에 대거 집결
독립군에 대한 통수권 싸움이 한인 공산당 지도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음
- 통수권 싸움은 한국 독립군 전체를 누가 지휘 하에 두느냐라는 싸움이었고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주도권 싸움이기도 했음
- 그 배우에는 러시아 제정 붕괴를 틈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에 요청한 독립군 무장해제 요구가 있었음
1921.6.28~29 러시아의 붉은 군대는 대립하는 한인 부대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고 이로 인해 충돌이 일어났음
결과적으로 독립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이후 조직적인 활동 자체가 어려워졌음
2차시 - 중국과 일본, 대한민국
1. 장제스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1) 윤봉길의 의거
자유시 참변으로 사실상 대규모 항일 부대는 사라진 상태가 되었음
임시정부
1931 한일애국단 결성 - 김구가 중심이 되어 일본 요인에 대한 암살 계획을 실행하는 부대
1932.4.29 윤봉길의 의거
- 한인 애국단의 윤봉길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 행사에 폭탄을 던져 시라이시 육군 대장 등 2명을 살해
- 기타 다수가 중경상을 입었음
장제스 총통
-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
-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약속
- 후에 대만으로 물러나 국민 정부 총재가 된 장제스는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도 윤봉길 가족에 대해 언급했고, 한국 정부가 가족을 잘 돌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음
1945년 9월 2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는데 그 서명을 시케미츠 외상이 했음
- 시게미츠 외상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때 상하이 일본 공사였음
- 시게미츠 외상은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인물
절름발이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시게미츠 외상의 모습 => 윤봉길의 의거로 나타난 임정의 강한 의지가 일제를 패망시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
2) 윤봉길이 남긴 편지
윤봉길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두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음
너희도 용감한 투서가 되어라
현대를 사는 우리도 교훈과 사랑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 여기에 개재함
2. 일제의 만주에 대한 동화 정책
1) 왕도주의에서 황도주의로
1932 - 만주사변 후 괴뢰 만주국을 수립한 일제는 만주국의 건국 이념을 유교에 입각한 왕도 주의로 결정함
1933
- 황제 부의가 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를 건국 신으로 받아들였고, 일본의 역대 왕들을 신으로 하는 이념을 수용
- 만주국은 왕도주의를 변형시켜 일왕 중심의 황도 주의를 받아들였음
2) 일만동족론
일제는 만주에 대한 지배 정책을 조선의 연장 선상으로 만들어 나갔음
일본의 어용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음
만주 속국론 - 고대 만주국가인 발해가 일본에 대한 조공국이었다는 주장
일만 동족론 - 만주 민족과 일본 민족은 동족이라는 주장
일본은 조선에서 썼던 '일선동조론'과 유사한 동화이념을 만들어 만주국의 동화 이데올로기로 이용하려고 했음
3) 민족 협화 이념
당시 일본 본토의 과잉 인구를 이주시키는 정책을 쓴 일제는 서구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배일 운동 때문에 이주처를 잃었음
일제는 만주 방면에 이민을 장려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강조된 것이 '민족협화' 이념이었음
- 민족 협화 : 만주국에 사는 일, 한나라, 조선, 만주, 몽고의 5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협력하여 화합하자는 내용
민족협화 이념은 일본 민족을 중심으로 일본을 모국으로 생각하라는 동화 이념의 일종
- 각 민족의 언어를 존중하지만 일본어가 5족의 언어의 중심언어로 위치 매김 되었음 = 일본어를 배워라
"민족협화이념은 일제에 의한 만주국 지배이념이었음"
3. 중일 전쟁과 일제의 내선 일체 정책
1) 중일 전쟁 발발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 '내선일체' 정책 본격화
내선 일체 = 조선과 일본은 하나다
일본 본토와 조선을 제국의 중핵으로 삼아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드는 것이 목표
'내선 일체' 정책
- 지원제였던 조선인의 군대 동원을 징병제로 바꾸기 위한 수단
중일 전쟁
- 만주 사변과 마찬가지로 관동군에 의한 독단적 행동
- 중앙에서 군대의 행동을 추인
- 이때 관동군 장교의 입장에서 승진되어 도쿄의 육군 참모 본부 간부가 된 이시와라 간지는 자신이 만주 사변을 일으킨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후배들이 중앙을 무시하여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고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음
2) 내선 일체 정책 본격화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관제 조직 = 전쟁에 조선의 모든 것을 바침
1938년 -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1940년 - 국민 총력 조선 연맹
"내선 일체의 철저화와 조선 반도 동포의 황국 신민화를 최대 선결의 목표"
1. 아침의 궁성 요배
2. 일본 국기 게양
3. 신사 참배 강요
4. 모든 행사에서의 황국신민의 서사 낭송
5. '내선 일체의 역사'를 철저히 교육 -> 조선과 일본은 원래 하나였다.
6. 일어 교육 강화
3) 창씨 개명 정책
1941년 전쟁의 장기화를 예상한 일본은 조선 사회에 씨 개념을 도입 = 일본 이름을 가진 조선인을 전쟁에 내보내기 위함
- 조선인들의 성명을 씨명으로 바꿔 일본식 씨명을 가진 조선인을 전쟁터에 보내려 했음
조선에 일본식 집 제도를 도입하는것
- 조선식 혈통 제도 부정
- 조선인 각 가정을 천황가라는 종가와 연결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
유형, 무형의 압력 하에 조선인의 약 80%가 6개월이라는 짧은 기한 내에 창씨 개명을 마쳤음
- 1941년 말 81.5%에 달했음
일제는 이렇게 전쟁을 확대하는 준비를 하고 있었음
3차시 - 조선인 참정권, 광복군, 일제의 패망
1. 조선의 참정권 문제
1) 조선의 일본 본토 편입
일본 본토에서는 조선이나 대만에 대한 참정권 부여 여부를 둘러싸고 3.1 독립운동 후에 열띤 논쟁이 벌어짐
일제의 입장
- 조선, 대만을 식민지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내지 연장주의로 일관
- 조선, 대만의 민도 향상을 감안하여 적당한 시기에 이것을 일본 본토로 편입하겠다는 방침
- 조선의 훗카이도화 혹은 규슈화 등으로 불린 법적 민족성 말살 정책 = 조선과 대만은 이제 없다!
2) 조선의 중의원 선거 실시 운동
일본 본토
- 당시 일본의 제국의회는 귀족 의원(추천)과 중의원의 2원제
중의원이 국민투표로 대의원을 선출하는 제도
조선에서도 중의원 선거를 실시해 조선을 대표하는 중의원을 선출하려는 운동이 일어남
친일 단체로 알려진 국민 협회가 처음 이 운동을 시작
일본 본토에서는 박춘금이 최초로 중의원으로 당선
-> 조선인이지만 국적은 일본인
박춘금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에서의 중의원 선거 실시 운동이 일본 본토에 전개
일본 정부는 중의원 선거가 조선에서도 실시되고, 조선인 의원이 일본 본토의 제국 의회에 진출하게 되면 제국의회에서 그런 소수의 외지 인원들이 캐스팅 보드를 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음
-> 소수가 다른 정당에 붙으면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함
3) 중일 전쟁 발발 후 변화
1937 - 관동군이 중일 전쟁 도발
1938 - 조선에서 지원병제도 실시
1944 -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에 따라 일본 내에서 조선인의 처우 개선의 필요성이 주장
-> 모든 젊은 사람들은 전쟁에 끌려감 -> 목숨을 바치면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
1945.4 - 조선에서 중의원 제한 선거 실시가 결정
일본 정부는 내외지 법역을 폐지하고 조선과 대만을 내지로 편입시켜 내지연장주의를 완료하겠다는 생각을 피력하기에 이르름
- 대만과 조선에 법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동일하게 진행하여 하나로 만들려고 진행함
조선 총독으로 재임 중 조선인의 징병제 실시를 강력히 추진시킨 고이소 구니아키가 1944 일본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내외지 법역 통일이 본격화
4) 조선 총독 고이소의 주장
고이소는 조선총독 시절, 조선에서 항상 다음과 같이 연설
- 조선과 일본 사이에 차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차별을 제거하는 노력을 조선 측에 촉구
=> 조선 동포가 진정한 황국 신민이 되는 것이 선결 문제다! = 한국 사람들에게 황국 신민이 되면 차별이 없어질 것이라고 조선 인들에게 책임 전가
5)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부각된 문제가 징병제 문제
일본에선 오래 전부터 징병제가 실시됨
고이소 총독은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
- 일본에서 조선 동포에 대해서도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방침이 결정 되어 조선인들이 기뻐한다.
1944.7 - 고이소 총독은 징병제 실시가 차별 철폐의 가장 큰 조건이 되었다고 하여 1944.7 일본 수상이 됨
1946.1.1
- 수상으로 취임하자 조선에서의 중의원 선거법 실시와 일본과 조선의 병역 통일 문제를 추진
- 1946.1.1 부로 시행하기로 결정
- 조선은 일본 본토 완전 편입 일보 직전에 광복을 맞이한 셈
2. 광복군과 일제의 패망
1) 광복군 창설
일제가 조선을 전쟁에 총동원하려고 한 무렵, 임시 정부는 정식 군대 창설을 모색
- 1940.9.17 중화민국의 지원 하 중경에서 광복군 창설 = 장제스가 많이 지원해줌
- 한국광복군 이라고도 함
광복군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
-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정식 교전국, 교전 단체로 승격시켜 연합국 일원으로 만든다는 명백한 목표를 갖고 창설
임시 정부 수석 김구
-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
- 광복군은 '한중 양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양국공동의 적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를 목적으로 한다'라고 그 취지를 밝혔음
2) 광복군의 규모와 조직
1940.11
- 중국 시안에 광복군 총사령부 참정 부서를 만들었음
- 중국의 화북지방 거주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병사를 모집
1941.11
- 중화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에 대해 '한국 광복군 행동 규칙 9개조'를 제안
- 이를 받아들인 광복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중국 군사위원회에 직속하게 됨
- 중국인 장교가 광복군에 파견되어 군이 강화
- 종전 직전 총사령부 장교 56명 중 중국인 장교는 43명
- 전체 병력은 약 520명
3) 광복군의 활동 : 대일 선전 포고
1941.12.8 - 일본이 미국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 전쟁 발발
1941.12.10 - 임시정부, 대일 선전 포고
대일 선전 성명서
우리는 삼 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 영국, 미국, 소련, 캐나다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일본에 맞서 벌이고 있는 이 전쟁을 축하한다.
이 전쟁은 일본을 굴복시키고 동아시아 세상을 다시 세우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될 것이다.
1. 한국의 전 인민은 이미 일본에 맞서 반 침략전선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은 한 개의 전투 단위로서 일본, 독일, 이탈리아 침략국에 선전 포고 한다.
3) 광복군의 활동 : 미국전략사무국과 공동 작전 수립
광복군
- 중국에 파견된 미국전략사무국(OSS, 후에 CIA)과 협약을 체결
-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
일본군에 편입되어 남양군도, 중국 전선 등에 배치된 조선인 병사들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가
-> 광복군이 이러한 작전을 벌임
그들은 시안에서 특수 공작 훈련을 받았음
그들은 조선인 병사들을 산동반도로부터 미국 잠수함을 한반도로 보내 한국 내 요소를 파괴, 점령한 후 미군과 연계하여 한반도 내에서 무장 봉기를 유도하는 작전 수립
1945.8 초 김구와 OSS 장관 도노반 대사는 광복군의 한국 국내 진입작전에 합의
- 작전 수행 직전, 일제가 8.15에 패망
1943.9 광복군은 공작부대를 인도로 파견하여 2년동안 조선인 일본병들의 투항을 유도하여 영국부대에 협력
광복군은 한국 국내 진입 일보 직전에 일제가 패망하였기 때문에 작전을 수행해보지 못한 김구는 대단히 아쉬워했다고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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