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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와 영토 5주차 - 일제의 탄압

이게될까 2024. 10. 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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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3 - [기타] - 역사와 한국의 영토 5주차 정리 및 퀴즈

 

역사와 한국의 영토 5주차 정리 및 퀴즈

2024.10.06 - [기타] - 한국 역사와 영토 5주차 - 일제의 탄압 한국 역사와 영토 5주차 - 일제의 탄압1차시 - 일제에 의한 탄압 (1910~1931)1. 일제에 의한 무단 정치 시대 (1910~1919)1) 일제에 의한 한국 지배

yoonschallenge.tistory.com

 

1차시 - 일제에 의한 탄압 (1910~1931)

1. 일제에 의한 무단 정치 시대 (1910~1919)

1) 일제에 의한 한국 지배 정책

1910.8.29 - '한일 병합 조약'의 반포로 대한 제국은 일본 지배하에 들어갔다.
8.22에 조약이 맺어졌음 
국가라는 뜻을 없애기 위해 일제는 국호를 바꿨다
대한제국 -> 조선 - 또 하나의 나라가 있으면 안된다! 하나의 지방으로 쳐야 한다.
황제-> 왕전하 - 일왕이 천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래에 넣기 위함 

1910년에서 1919.3.1 독립운동이 시작될 때 까지는 '무단정치'로 불리는 압박 통치가 강행되었음
이 시기의 일제의 지배 정책
치안 유지, 생명 재산의 안전 확보 = 반대파 숙청정책 

 

2) 차별 교육 정책

일본 - 일본 본토에서는 소학교 6년제를 시작
한국 - 보통학교 4년제 실시, 조선인은 상급 학교 진학을 장려하지 않음, 일어와 수신, 실업 위주(공장에서 일을 시키기 위함)의 교육 실시 
수신 : 일본의 도덕 교육 

일제는 동화 이념(조선인이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 민족 말살 정책)을 보급 시작
조선 총독부 편에 실린 조선 민중의 복리를 증진, 정신력을 동화 도모를 위한 내선일가 
일제는 내선(내지 <일본 본토>와 조선), 즉 일본과 조선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라는 이념을 보급 

 

3) 잡거 정책

일제는 일본 본토로부터 조선, 대만 만주 등에 대한 이주를 장려 
이주 정책 = 잡거 정책
동화 정책 중 하나로 일본인과 조선인, 대마인 등을 함꼐 살게 하여 조선인, 대만인 등의 일본인 화를 촉진시키는 정책

1908.12에 설립된 동양척식회사가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이민을 맡았음

각 민족의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일본인을 조선, 대만, 만주 등에 이주시킨다는 목표가 있었음

조선에는 200만 명 정도 일본인을 이주시키는 계획이었으나 전쟁 등으로 차질이 생겨 광복 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의 인구는 70만명 정도였음

 

4) 식민학과 개설

일제는 일본의 주요 대학에 식민 학과를 개설, 서양의 식민지 지배 정책 등을 연구시켰음

니도베 이나조,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대표적 일본의 식민학자

그들은 '식민지 선진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선례를 연구
영국 - 무단 통치(원주민을 살해, 말살 -> 대만과 조선에 적용), 자치 주의
프랑스 - 동화 정책(각 민족을 프랑스 인으로 만든다.), 본국의 법 제도를 식민지에 그대로 시행하는 내지(본토) 연장주의(본토의 법을 식민지에 적용하여 동화된다.), 본토인과 식민지 주민과의 결혼 정책

일본의 식민학자들은 조선을 영국의 식민지 인도와 같은 자치식민지로 해야 한다고 제안
BUT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 점이 한계 

 

5) 독립군 진압 작전

일제는 조선 내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진압하려고 군사 작전을 벌임
독립군에 의해 사살된 일본 군인들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서 신으로 모셔짐
야스쿠니 신사에는 한국 독립군과의 전투로 숨진 일본 군인들들의 명단과 그 생전의 역사 기록

일본 수상과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한국이 비판하는 이유 중 하나
한국 독립군을 탄압한 군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의 신으로 모셔져 있기 때문 

 

2. 일제에 의한 문화 정치 시대 (1919~1931)

1) 3.1 독립 운동의 영향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표명으로 조선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났음

일제는 3.1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
BUT 세계 각국의 눈을 의식한 일제는 일시 동인(조선을 일본과 평등하게 본다), 내지 연장 주의를 강변하여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일부다"

세계 최초의 비폭력 시위 == 3.1운동
윌슨 대통령의 '민졸자결'로 특히 조선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기운이 생겼기 때문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 자체라고 강변함으로 독립운동을 좌절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음

 

2) 일선 동조론

동화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일제는 일본 본토와 거의 같은 교육제도를 조선에 도입, 교과목 내용은 조선에 맞게 동화주의적 경향 강화 - 일선동조론 : 조선과 일본은 조상이 같다.

일본의 보통 학교에서 일본사와 일본 지리 과목이 추가, 조선사와 조선지리는 일부만을 가르짐
- 역사 교육에서 '일선동조론'이 강화되어 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신 수사노오가 조선의 시조 단군이었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가르침 
- 원래 하늘의 나라에서 남매였던 조선과 일본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한일병합 정당화 이론으로 이런 신화 이용

단군 이야기와의 관계
- 일제 시대 일본 학자들이 수노사오는 고조선의 단군이라 주장
- 일제시대엔 아마테라스 뿐만이 아니라 단군(수노사오)도 조선 신궁의 신으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한 때 일본 국회에서 논의
- 이 것이 일선 동조론의 중심적인 얘기가 되었고, 조선 총독부가 만든 조선의 역사교과서에 실렸음 
- 수사노오는 신라의 '소시모리'에 강림했다고 <일본서기>에 나옴
- 그러므로 일본에서 '소시모리'란 '소의 머리'라고 해석하여 춘천의 우두산이 수사노오가 강림한 땅이라고 주장, 신사 건립
- 일제시대 강원도 춘천에는 일선 동조론의 상징인 '수사노오 신사'가 건립
- 일제는 이렇게 한 민족의 정신까지 왜곡시키려는 동화정책 본격화

최남선이 재조명한 고조선과 단군
- 일제의 일선동조론에 대항하기 위해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이 고조선과 단준 재조명 
- 최남선이 단군이 결코 수사노오가 아니었다는 논설 펼침 
- 일제의 동화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1920 동아일보를 통해 단군 왕검의 초상화 모집
- 수사노오가 단군이라는 설을 완전히 부정, 고조선의 역사는 일본 역사가 시작되기 17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강조 
- 최남선은 터키, 중앙아시아, 만주, 몽고 등에 살고 있었던 민족이 태양신을 숭배하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의 지도자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
- 그러한 지도자들이 모두 단군이라고 불렸고, 그 단군들의 정상에 군림했던 가장 권위 있는 단군이 바로 단군왕검, 고조선의 시조였다는 역사관 발표
- 1943년 한국어로 펴낸 고사통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런 내용 집대성
- 친일파로 분류되지만 정신적 세계에서는 일본에게 굴복하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평가됨
- 일제시대 조선 내에서 있던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 중 하나의 예 

 

2차시 - 지배 정책, 친일 인사

1. 문화 정치 시대 (1919~1931)에 일제의 지배정책

1) 민족 학교 폐교 정책

조선 총독부
- 3.1 독립운동의 주체 세력으로서 종교 단체와 사립 학교를 지목
- 사립학교에 대한 설립 기준을 강화 => 폐교로 이어졌다.

1912년 - 1362교 (종교계 545교, 일반 사립 817교)
1920년 - 690교 (종교계 260교, 일반 사립 430교)
종교계 사립학교 52.3%, 사립 학교 47.2% 격감 

1930년 - 424교 (종교계 182교, 일반 사립 242교)
종교계 사립학교 66.6%, 사립 학교 70.4% 격감 
원래의 30% 정도가 된 것으로 법을 통한 민족 학교를 탄압하였다.

 

2) 보통학교 확충

총독부
- 공립보통학교 확충 계획
- 기존의 학교를 활용하여 일본의 보통학교로 바꾸는 방법
서당, 사설 학술 강습회 -> 사립 학교 -> 사립 보통학교 -> 공립 보통학교 

모든 학교에 일제의 교육 방침 반영
치안 대책과 민족 사상 대책(3.1 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보통 학교 확충 계획을 한꺼번에 진행

보통학교
조선인 학생들에 대해 동화교육을 실시하는 수단.

 

3) 총독부에 의한 조선 지도자 포섭

총독부
- 조선의 지도자를 포섭, 친일 인사로 만드는 정책

조선인들이 모두가 존경할 만한 일류 인물들을 친일 인사로 만드는 작전
- 조선 민중에 대한 교육 효과를 최대화 하기 위한 정책

총독부는 3.1 독립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들을 포섭하기 시작
최남선 - 3.1 독립 선언문을 작성
이광수 - 2.8 독립 선언문을 기초 
최린 - 독립 운동의 추진 역할 
"총독부는 3.1 독립 운동의 중심 인물들을 전향시켜 친일 인사로 변신"

 

4) 친일 단체 결성

총독부의 친일 인사 육성책
- 친일 단체 결성

친일 여론 조성을 위한 친일 단체
- 교풍회, 국민 협회, 대동동지회 등 

대지주와 일제 예속 자본가들의 친일 단체
- 대정 친목회, 유민회 == 일본에 협력하는 대지주와 예속 자본가 

기타 여러 분야 여러 계층에서 친일 단체들이 결성 -> 일본 정부의 정책 

 

5) 재한 일본인에 대한 한국어 교육 강화

재한 일본인에 대한 정책
- 한국어 교육 강화

1921년 5월 총독부는 한국어 장려 규정 발포
- 일본인 관리들에게 한국어 시험 실시 

총독부는 시험 결과를 3등급으로 나누어 합격자에게 수당을 지급 
- 합격자 수 1921: 560 -> 1926: 2725 

일본인의 한국어 학습
- 조선의 민심을 잡으려 한 정책의 일환으로 잡거 정책의 하나이다.
-> 일본인이 한국어를 할 수 있어야 조선인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는 잡거 정책 중 하나.

 

6) 조선인 관리들의 일본 시찰 여행

총독부는 조선인 관리들에게 일본 본토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일본 본토로 출장 시찰 시켰다.
제 1회 - 1920년 5,10,11월

이 것을 계기로 조선인의 일본 본토 시찰을 장려하여 각도에서 시찰단을 조직화

'일본을 보면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는 사상이 근저에 깔려 있음
- 발전된 일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호감을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정책은 현재도 많이 실시됨
- 일본정부는 한국인 청소년들에 대한 일본 여행을 장려, 지원

 

2. 일제의 친일 인사 육성 

1) 최남선의 경우

일제의 최남선에 대한 평가
신동이라고 평가하며 숭배 대상 등 고평가 진행. 1919년 소요 사건 선언서 기초자라고 말함 

 

2) 최남선이란 누구인가?

최남선은 해방 이후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했고, 이승만 정권의 독도 정책에 큰 영향을 준 인물

일제도 존경한 최남선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1901 - 만 11살 때부터 '황성 신문'에 투고했을 만큼 수재

1906 -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지리 역사 학과에 들어가 유학생 회보 <대한 흥학 회보>를 편집하며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 

1907
- 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하여 자택에 출판하 '신문관'을 설립
- 신문관 설립의 동기로는 기울여져 가는 한국을 구하고 싶다고 한 아버지의 부탁으로 16만원이라는 큰 돈을 얻어 인쇄기를 구매해 '신문관' 설립

1908
- 잡지 '소년' 창간
- 큰 인기를 얻었는데 잡지의 문예, 지리, 역사, 과학 등의 원고는 최남선 혼자 집필 => 대단한 수재
- '소년'을 통해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고, 정형시로부터 신체시(자유 형식의 시)의 시대를 열음 => 문학적으로도 대단한 재능 

1914 
- 문예지 '청춘' 창간
- 이광수와 함계 '문단 2인 시대'라고 불리는 정도로 붐을 일으킴 
- 청춘 = 시조, 한시, 신체시, 단편 소설, 수필 등을 실었고, 많은 사람들을 계몽했음 

1919 - 3.1 독립운동 선언서를 기초해 일제에 의해 구속

1921.10
- 가출소한 최남선을 조선인들이 '천하의 거인' 이라 하여 크게 환영
- 그 후 그는 주간지 '동명', 신문 '시대일보' 등을 창간하며 활발한 언론 활동 진행 

1927 - 단군 왐검을 중심으로 한 조선 중심의 '불함문화권'을 주장하여 그 문화권이 중국이나 일본, 유라시아 전체에 확산되었다는 학설을 발표 

 

3) 친일파로 변신

1928.12
-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의 위원이 됨 == 전환
- 많은 조선인들이 이로 인해 최남선을 비난 시작
-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는 소위 '황국 사관'에 입각한 '위사'이기 때문 == 천왕 중심으로 돌아감 

1939 
- 일본 관동군이 괴뢰 만주국 장춘에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됨
- 최남선은 조선의 존재를 올바르게 인식시키기 위한 활동을 했다고 하여도 친일 인사가 되었으므로 조선인들의 시선은 차가웠음 

1943
- 그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의 학도병 동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감 == 일제가 시킨 일, 거절하지 않음
- 그는 다음과 같은 수용하기 어려운 논리로 유학생들에게 전쟁에 나가도록 권고 "여러분들이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조선이 잃어버린 무사(사무라이)의 정신을 되찾기 위해서다. 신라, 고려 시대까지 우리 민족은 씩씩한 무사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조선 시대에 상실했기 때문이다." == 약해진 조선을 다시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을 받아들여야 하고,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 그는 일제의 아시아 침략을 교묘한 논리로 미화, 정당화 함 

 

4) 만년의 최남선과 평화선 

1944 - 최남선은 조선에 귀국, 자택에 틀어박혀 집필 활동에 전념 

해방 후 1949
- '반 민족 행위 처벌법'에 의해 처벌을 받음
- 신문 자리에서 그는 변명하지 않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솔직히 인정

1950.6
- 한국 전쟁 중, 그의 장녀는 공산군에 의해 학살당하고 장남은 행방불명, 3남은 사망
- 그의 17만권의 장서는 소실 

1951 -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주장

1952 - 평화선 설정에 영향력 행사
-> 이승만 정권에 최남선이 많이 협력했다.

1957.10 - 67세로 영민 

 

5) 최남선에 대한 평가

- 한국의 부흥을 꿈꾸며 문예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

- 3.1 독립 운동 선언서를 기초

- 독특한 학설로 일제의 동화 정책에 대항 
-> 애국자로서의 최남선

- 그러나 중간에 친일 인사로 전락

- 해방 후 처벌을 감수했고,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 이승만 평화선에 영향력을 행사

- 애국 행동과 반민족 행동을 오갔던 인물 

 

3차시 - 중국과 일본 

1. 만주 사변

1) 간도 문제

일제 식민지 지배를 피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 땅으로 유입

특히 조선과 접하는 간도 지역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하게 되었음
3.1 독립 운동 이후 -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중국에 형성되고, 간도 지역에는 독립군이 모였음
1920년대 -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으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둠 

일제는 이 지역이 사상적으로 복잡하고 치안 상으로 매우 위험한 지역으로 인식 

일제는 간도 문제가 조선 전체의 치안을 위태롭게 하는 요소를 갖고 있다고 판단 

 

2) 만주 사변의 배경

만주 - 미국이 간섭할 기미를 보이고, 중국인들이 일본에 반항하는 움직임을 보임
=> 일본 관동군은 독단으로 군대를 움직여 1931 만주 사변을 감행해 괴뢰 만주국을 건국하기에 이름

일제 - 간도 문제를 잘 못 취급하면 조선 지배도 위태롭게 될 우려가 있다고 인식
일제의 인식 - 만주 문제란 조선 문제 

 

3) 만주 거주 조선인을 위한 시책

일제는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여러 시책을 시행

만주 문제가 조선의 치안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일제는 만주 거주의 조선인들에 대해 각별히 신경 씀 

1. 만주 거주 조선인들을 지원해 자작 농가를 증가 

2. 만주 조선인 교육 시설을 지원 

3. 만주 각지에 진료소 설치 

4. 만주, 특히 간도 지역에 농업 기술자, 수의 등을 파견
-> 농업과 축산 지원

5. 만주 각지에 한국어 매일 신보, 월간 조선 등을 무료로 배부하여 조선 내의 여러 사정을 알림 
-> 조선이 안정화 되어 있다는 홍보를 하기 위함 

6. 일본 본토와 조선을 시찰하는 시찰단을 구성
만주, 간도의 안정 == 조선의 안정 

 

2. 관동군의 폭주 - 만주사변

1) 관동군의 폭주 

일제는 만주지역 독립군 소탕 작전과 만주 거주 조선인에 대한 복지 정책으로 만주를 안정화시키려고하는 정책을 갖고 있었음
-> 독립군에 대한 탄압

그런데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킴 
- 만주 사변은 만주의 치안 문제를 의식한 관동 군의 독단적 행동 
-> 명령 없이 이루어진 행동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칸지 - 조선의 통치는 만몽(만주와 몽골)을 우리 세력 하에 두는 것으로 하여 비로소 안정시킬 수 있다.

관동군은 부대원들에게 만주 점령에 관한 논문을 작성케 함. 그 중 우수한 2편을 선정해 만주 사변의 시나리오 작성

잘 구성된 시나리오대로 움직여 관동군은 거대한 만주 지역을 3개월 정도로 점령해 세계가 경악

문제 - 일제 중앙에서는 이런 관동군의 독단적 행동을 처벌하지 않았고, 만주 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모든 행동을 추인(후에 인정함) 
명령하지 않은 행동을 처벌하지 않았다!

군부가 상부의 명령이 아니라 독단으로 행동하여 성과를 올렸다 해도 법적으론 주동자들이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일제 중앙은 처벌은 커녕 추인해 상까지 주는 한심한 형태를 보였다.
- 이유는 관동군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음

현장에 있는 군부가 알아서 전쟁을 확대한다는 기형적인 군 중앙과 현지군의 관계가 나타나기 시작
- 결국 군 중앙이 현지군을 통제 못하게 된 것이 일제 패망으로 이어지게 되었음

 

2) 5.15 사건

일본 수상 이누카이 쓰요시 - 일본의 제국의회에서 만주 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행동을 비판

1932.5.15
- 관동군 장교들이 만주에서 도쿄에 올라와 이누카이 수상을 비롯 만주국 건설을 비판한 인사들을 '부패세력으로 몰아세워 권총으로 살해
- 이후 일본 국민들이 군부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되었고, 군부가 주도하는 '공포 정치'로 전락 

 

3) 일제, 국제 연맹(UN의 전신) 탈퇴 

국제 연맹 (릿토 조사단)
- 만주에 조사단 파견, 조사 
- 릿톤 조사단 : 일제의 만주국 건국을 '침략'으로 규정 
=> 이에 반발한 일제는 국제 연맹을 탈퇴 

일제는 세계 각국과 대립하는 길 선택

그 후 일제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도발해 스스로 패망의 길을 질주

 

4) 현재에 대한 함의

일제는 관동국의 독단적 행동을 반성하지 않은 체 패망해 군대는 폐지

현재는 한국 전쟁 당시 경찰 예비대로 발족된 자위대가 일본의 방위 담당 

일본에서 자위대한 문민 통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으나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현장의 판단을 우선시한다는 버릇이 완전히 고쳐진 것은 아니다. 

2019.9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한 '안보법제'가 일본 국회를 통과 

이 법의 운영에 대해서 한미일 간에 약속이 있다.
- 한국의 승인이 없는 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은 없다는 약속

그러나 한국 측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음
- 일제 시대 일본군이 상부 명령을 무시하여 독단적으로 움직여 전쟁을 확대시킨 사례 때문
- 일본은 아직까지 반성이 없기 때문

일본 측은 한국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일제시대 일본의 '침략'이라는 사실을 깊이 반성, 자위대 폭주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전을 가해야 함 

 

3. 2.26사건

1) 1936 2.26 사건 발발

일본 육군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청년 장교들이 약 1400명의 하사관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궐기

'쇼와 유신, 존황토간'을 슬로건으로 무력으로 부패된 원로, 중진들을 살해하면 천황친정(일황이 직접 정치를 한다.)이 실현되어 부패정치나 정경 유착 등 그들이 생각하는 악이 해결되고 농촌 등의 피폐가 수습된다고 생각

사살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들 - 장교들이 부패제에 의한 탄압 (1910~1931)

 

2) 2.26 사건의 피해 

사살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들 - 장교들이 부패세력으로 간주한 사람들 
마쓰오 총리 비서(전 육군 대사) => 오카다 총리로 오인 받아 총살
다카하시 대장대신(전 총리) => 총살
사이토 내대신(전 총리, 전 조선총독) => 40발 이상의 탄환을 받아 기관총으로 총살
와타나베 육군교육총감 -> 기관총으로 살해
스즈키 해군대장 -> 중상, 후의 일본 총리 
기타 -> 경찰관 5명 살해, 1명 중상 

반란부대는 육군성, 참모본부, 아사히신문 도쿄본사 등 습격
- 현재도 일본 정치의 중심인 나가타쵸, 가스미가세키, 아카사카 등 일대 점거 

 

3) 2.26 사건 수습

2.27
- 계엄령 발령
- 신뢰한 측근들이 살해된 쇼와천황(일왕) 히로히토는 격노
- 히로히토 : 반란부대 진압 칙령을 내림 

2.28
- 계엄령 사령부, 무력 진압을 천명
- 반란부대를 포위 

2.29
- 라디오 방송으로 투항 칙령(황제의 명령)을 반란부대 병사들에게 알림
- 투항을 권고하는 애드버른이 올라가 병사들을 설득
- 천황친정을 목표로 했으나 천황자체가 자신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한 것을 알게 된 장교들이 모두 투항
- 천황이 직접 사태 수습에 최초의 사건 
- 육군 내 황도파가 일소되어 통제파 도조 히데키가 실권을 장악 

 

4) 2.26 사건의 영향
1932년의 5.15사건, 1936년의 2.26사건 
" 결과적으로 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된 것이 일본의 실상"
=> 이후의 일본 -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인 중국 침략으로 나서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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