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3 - [기타] - 역사와 한국의 영토 4주차 정리 및 퀴즈
1차시 - 울릉도
1. 17 세기 울릉도 분쟁의 시작
1) 울릉도에 도항하기 시작한 일본
독도 - 우산도
시마네현 - 우즈모
17세기 초
일본 돗토리번의 상인 오야 진키치가 일본 북쪽에서 배로 돗토리로 귀항 중 표류해 우연히 울릉도 발견
같은 상인인 무라카와 이치베와 함께 에도 막부(일본 사무라이 정권)에 도해 면허 요청, 발급
-> 불법적이었으나 면허를 받았다.
울릉도에서 벌채, 어로 등을 하여 일본에 목재와 어패류 하는 장사 예정
2) 울릉도 도해 면서
1625년 경에 발급된 것으로 보인다.
뇌물 수수 등으로 에도 막부의 류주(막부 장군의 보좌)들 중 일부 사람들만 승인한 불법 면허
당시 류주들이 전원 일치로 의결 했다고 했으나 8명이었던 류주 중 4명만 서명한 불완전한 면허 였다.
-> 불법적인 면허다!!
3) 일본 측의 주장
1625 - 기한 1년의 면허를 발급받았는데 오야, 무라카와 두 가문은 막부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한번도 갱신하지 않은 채 70년 이상 불법으로 울릉도에 도항
처음에는 1618이라고 말을 했었다.
1693 - 약 70년간 오야, 무라카와 가문은 번갈아 울릉도, 독도를 왕래하여 나무를 벌채, 어패류 등을 채취하여 일본에 팔아 큰 이익을 얻음.
그 때 그들은 독도를 울릉도로의 기항지로 사용, 일본 측이 독도를 처음으로 실효 지배한 나라는 일본이라고 주장
일본 측의 주장 - 당시 울릉도는 무인도 정책으로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으므로, 울릉도를 넘어 독도로 가는 조선인은 사실상 한 사람도 없었기에 조선이 독도를 영유했다고 할 수 없다.
2. 조선의 울릉도 수색 작업
1) 조선의 울릉도 정책
1430년대 - 조선은 태종의 명령으로 1430년대까지 울릉도로 관리들을 보내 울릉도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데려왔다.
-> 울릉도를 무인도로 만들었다.
1511년 - 1511년까지 약 5년에 한번씩 울릉도를 수색했으나 이후 약 180년간 울릉도에 관리들을 파견하지 않았음
1694년 - 그 후 처음으로 울릉도에 조선 관리가 파견된 해는 1694년. 그 기간 중 1625년경부터 1693년까지 약 70년간 돗토리 사람들이 울릉도, 독도를 왕래
조선 왕조 - 일본의 대마도 관리들에게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항상 확인시켜준 사실이 있음
일본 - 조선이 사실상 울릉도를 포기해 있었다고 주장
3.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 분쟁의 시작
1) 울릉도의 조선인들
1692년 봄 - 안용복을 비롯한 약 40명의 조선인들이 울릉도로 도해 (당시 금지사항)
그 해에는 무라카와 가문 사람들이 울릉도로 도해해 왔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울릉도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오야 사람들은 울릉도에 상륙하지 않고 돗토리로 돌아갔음
1693년 봄 - 오야 가문 사람들이 울릉도로 도해해 와서 역시 많은 조선인들이 울릉도에서 활동하는 모습 목격
2) 안용복 납치사건
1693년 봄
2년 연속으로 울릉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생각한 오야 가문 사람들은 울릉도에 상륙, 조선인들과 언쟁을 벌임 - 여기 일본 땅인데 왜 오냐, 여긴 조선 땅이다!
일본어를 할 줄 알았던 안용복을 일본으로 납치 + 박어둔 납치
두 사람이 돗토리번에서 심문 받고 나가사키와 대마도를 거쳐 다시 조선에 돌아옴
이 사건을 계기로 조일 간 3년에 걸친 '울릉도 분쟁'이 시작됨
4.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한 일본 에도 막부
1) 일본 에도 막부, 독도를 조선 영로로 인정
1696년 1월 - 일본의 에도막부 장군은 조일 간 울릉도 분쟁에 대해 보고 받는 막부 회의에서 돗토리번주에게 울릉도가 어느 나라에 가까운가를 물었음
돗토리 번주 - 울릉도는 일본보다 조선에 가깝습니다.
장군 - 울릉도에는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가?
돗토리 번주 - ㄴㄴ. 1년에 한번씩 도항만 했음
장군 - 일본인도 없고, 조선에 가까우면 조선 땅이다.
돗토리 번주 - 우리 돗토리번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긴해
장군 - 울릉도랑 비슷한 섬 있음?
돗토리 번주 - 송도(독도)가 있다.
장군 - 일본 섬임?
돗토리 번주 - ㄴㄴ. 도중에 있는 작은 섬이고 가끔 들러 기항지로 사용했을 뿐 일본 어떤 나라(지방)에도 속해있지 않다.
에도 막부는 울릉도 뿐만이 아니라 독도까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조선 영토 임을 인정
이리 하여 에도 막부는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음
2) 일본의 주장은 성립되지 않음
송도(마쓰시마 = 독도)가 자신의 영토가 아니라고 한 돗토리번의 보고서
17세기 말 일본 에도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일본 영토 아니라고 인정
한국에선 '울릉도 쟁계', 일본에선 '다케시마 일건'이라 칭함
17세기 중반 일본이 독도를 왕래한 사실이 있으나 17세기 말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함에 따라 독도 영유권 문제는 이때 결론 난 것이 역사의 진실
일본이 17세기 말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 것이 옳은 역사적 사실이다!
2차시 - 숙종과 독도, 안용복
1. 안용복의 일본도항
1) 안용복의 도일과 그의 공로
1696년 5월
안용복 등 11명이 울릉도, 독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감
그들은 돗토리번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
숙종은 안용복이 두 섬을 지킨 공로를 인정해 무단 외국 도항의 사형을 유배로 감형 - 숙종 실록에 기제
2. '숙종실록 권30'에 그려진 안용복의 도일1
1) 체포된 안용복
돗토리번에서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 안용복은 무단 외국 도항 혐의로 체포되어 다른 10명과 함께 비변사에서 심문을 받았음
2, 3) 독도에서 일본인들을 추방한 안용복, 돗토리로 향한 안용복
안용복 등 11명이 비번사에서 주장한 내용
1. 1969년 5월 울릉도에서 돗토리번 사람들의 배가 나타나 그 사람들을 쫓아 우산도(독도)까지 갔음
우산도를 자산도로 잘 못 알고 있었음
우 자를 자 자로 잘 못 읽었음
2. 우산도(독도)에서 일본인들을 쫓아내고 그들을 추격하다가 표류해 오키섬에 도착
3. 3년 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이라는 일본 관백(장군)의 서계(외교문서)를 받았음
-> 그러나 약속을 어겨서 일본인들이 다시 두 섬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을 규탄하기 위해 돗토리로 간다고 안용복이 오키섬에서 말했다.
4. 안용복은 조선고관의 옷을 입고 배를 타고 '울릉 자산 양도 감세장'을 가칭하고 돗토리번 호키주까지 감
3. 일본 측 비판과 한국 측 반박1
1) 울릉도 도해 금지령과 돗토리번
'숙종실록'의 내용에 대한 일본 측 비판과 그에 대한 한국 측 반박
일본 측 비판 - 1696.1 에도막부가 '울릉도 도해 금지릉'을 내렸기 때문에 1696.5 돗토리번의 배가 울릉도와 독도로 갈 리가 없다.
한국 측 반박 - 당시 에도에 있던 돗토리 번주에게 '울릉도 도해 금지령'이 내려진 것은 1696.1월임
'금지령'이 돗토리 번 호키주에 전달된 것은 1696년 8월 1일이었다.
안용복 일행이 오키섬에 도착한 5월에 돗토리번은 물론 오키섬에서도 울릉도 도해가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 돗토리 어부들이 그 해 봄에 울릉도에서 어로작업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 안용복이 받은 서계
일본 측 비판 -
1693년 납치되었을 때 안용복이 일본의 관백(장군)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서계를 받았다고 하나 그것은 허위다.
한국 측 반박 -
1693년 납치된 안용복이 장군이 누군지 알 리가 없었기 때문에 돗토리 번주나 그 대리인이 안용복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서계로 보이는 서한을 건네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돗토리 번주는 1693년 시점에서 벌 써 두 섬이 돗토리 소속이 아니라는 입장이었기 때문
4. '숙종실록 권30'에 그려진 안용복의 도일2
1) 대마도주의 죄상
비변사에서 안용복 등이 진술한 내용
1. 돗토리 번에 도착한 안용복은, 3년 전 대마도주가 두 섬이 조선 영토라는 서계를 뺏었으니 막부에 그 죄상을 써서 상소문을 올린다고 했고, 돗토리 번주는 이를 허락했다. - 숙종 실록에 적혀있다.
2. 대마도주의 아버지 소 요시자네가 에도에서 돗토리 번으로 내려와 그런 상소문을 올리면 대마도주인 자신의 아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하여 안용복에게 잔절히 사죄해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 금지하겠다고 약속, 안용복은 작성해 놓은 상소문을 올리지 않았음
3. 돗토리 번주와 대마도주의 아버지는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이 이미 조선땅이라고 인정
4. 안용복 일행은 돗토리번으로부터 동해를 횡단,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5. 일본 측 비판과 한국 측 반박2
1, 2) 돗토리 번주와 대마도주의 아버지의 소재, 안용복의 일본어 실력
일본 측 비판 - 돗토리 번주나 대마도주의 아버지는 당시 에도에 있었기 때문에 안용복이 돗토리번에서 그들을 만났을 리가 없다.
한국측 반박
- 역사적 사실로 돗토리번주 이케다는 7월 19일자로 돗토리번으로 돌아왔음
- 안용복 일행은 8월 초까지 돗토리번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케다 번주 혹은 그 대리인이 조선의 고관을 사칭한 안용복을 만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그로므로 안용복은 자신을 응대한 사람을 돗토리 번주로 생각했을 것으로 판단
- 6월에 대마도주의 아버지는 안용복에 대한 조사를 위해 파발을 돗토리번에 보낸 사실이 있음
- 그때 파발이나 그 대리인이 안용복과 면담했을 것이고 안용복은 자신을 면담한 사람을 대마도주의 아버지로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나온 예기를 비변사에서 말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안용복이 일본어를 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잘 못했다는 기록도 있어 일본어 실력이 완벽하지 않았다고 보임
- 상대가 누군지 정확히 알아봤다고 할 수 없다. ==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3) 대바도 주는 이미 사망
일본 측 비판
- 안용복이 에도막부에 고소하려고 한 대마도주는 1693년에 사망했음
- 그러므로 대마도주의 아버지가 안용복의 상소문이 에도에 올라가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었음
한국 측 반박
- 울릉도 분쟁을 일으킨 대마도주는 1693년에 사망했으며, 그 후 그 동생이 도주가 되었음
- 그러나 울릉도 분쟁은 사실상 대마도주의 아버지 소 요시자네가 도주의 배후에 군림하면서 일으킨 사건이었으므로 안용복의 상소가 에도에 올라갈 경우 난처한 입장에 처해질 사람이 바로 대마도주의 아버지 자신이었음
- 대마도주의 아버지나 그 대리인은 아들이 사망한 것을 잘 모르는 안용복에게 아들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면서 상소문이 에도에 올라가지 않도록 막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
4) 안용복의 진술의 진위 여부
일본 측 비판 - 안용복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비변사에서 거짓 진술을 한 가능성이 큼
한국 측 반박
- 비변사에서는 안용복 뿐만이 아니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나머지 10명도 모두 신문을 받았음
- 엄격한 신문을 받았는데도 그들의 말이 일치한다는 것으로 보아 안용복의 진술이 허위라고 하기 어렵다.
6. '숙종 실록'이 주장하는 독도 영유권
1) 독도는 조선 땅
'숙종실록'이 국가 기록이므로 이 문헌 속에서 독도가 조선 영토임이 몇 차례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숙종 실록' 권 30. 병자 22년 9월 무인조 -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왜인들을 마주 친 당시
대마도주 아버지의 말 - 두 섬이 귀국에 속한 이상 혹시 다시 월경하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멋대로 침범하는 일이 일어나면 국서를 작성하고 역관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즉시 당연히 무겁게 처리할 것이다.
- 숙종 실록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 일본 측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안용복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억지 주장을 되풀이해 왔다고 판단.
3차시
1. 안용복의 행적을 보여주는 일본 측 문서
1) 새 자료의 발견
일본 측이 비변사에서 안용복이 진술한 내용이 거짓이라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안용복의 진술을 뒷바침 해주는 일본 측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
2005년에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어 공표
- 1696년 안용복 일행이 오키섬에 도착했을 때의 취조 기록
=> 원록 9병자년 조선배 착안 한권의 각서 (안용복 외 11명의 취조 기록이 남겨져 있음)
2. '원록각서' 속의 기록
1) 울릉도와 독도는 강원도 소속
안용복의 기록 - 대나무 섬을 죽도라고 하는데 조선국 강원도 동래부 안에 울릉도라는 섬이 있고, 이 것을 대나무 섬이라고 합니다. 곧 팔도 지도에 적혀있고 그 것을 갖고 있습니다. - 안용복이 진술하여 작성되어 있다.
당시 울릉도는 강원도에 속했음
- 울릉도가 조선 땅이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
- 동래부는 안용복의 고향이며 부산에 있으므로 이 말은 별로 의미가 없음
'팔도 지도'
- 안용복이 오키섬으로 갖고 갔다는 '팔도 지도'는 현존하지 않음
안용복의 기록 - 송도는 강원도 안에 자산(소우산 = 독도)이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을 송도라고 합니다. 이 것도 팔도 지도에 적혀 있습니다.
-> 이 진술은 오키섬 관리가 그대로 적어 놓았다.
안용복은 송도(독도)를 자산도라고 불렀음
- 숙종실록에 나오는 말과 일치
- 독도의 역사적 명칭인 우산도의 '우'자를 '자'자로 잘못 본 결과
독도를 '소우산'이라고 함
-독도를 우산국의 작은 섬으로 보고 말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2) 울릉도와 독도까지의 거리
안용복의 기록 - 3.18 조선국에서 아침밥을 먹은 뒤 출선 해 같은 날 죽도(울릉도)에 도착해 저녁밥을 먹었다.
당시 강원도 쪽에서 울릉도까지는 배로 이틀 정도의 거리
- 그러나 이 기록은 강원도 해안에서 하루만에 울릉도에 도착
- 울릉도가 조선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진술했다는 연구가 있다.
안용복의 기록 - 5.15 죽도(울릉도)를 출선해 같은 날 송도(독도)에 도착, 16일 송도(독도)를 출발하여 18일에 오키섬의 니시무라 해안에 도착
안용복은 두 달 정도 울릉도에 있었다.
- 5.15 울릉도를 출발하여 그날 독도(송도)에 도착하였고 독도에서 오키섬까지는 이틀 정도 걸렸다고 진술
-> 당시의 거리 감각과 일치
3) 원록각서 속의 기타 기록
기타, 원록각서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음
1. 조선에서 울릉도까지는 30리이고 울릉도에서 송도까지는 50리임
2. 안용복이 돗토리번에서 소송할 일이 있다고 하여 이인성을 시켜 소장을 작성
3. 촌장이 안용복의 요청을 받아들여 소장을 쓸 수 있는 민가를 대여, 쌀 등 음식물도 지원
4. 안용복이 돗토리번에서 소송할 내용에 대해 촌장이 확인하지 못함
해설 - 안용복이 조선과 울릉도가 가깝다는 점을 강조
- 조선 본토와 울릉도가 '하루 거리'라고도 했고, '30리'라고도 했음
- 이 후 일본 자료엔 조선 본토로부터 울릉도까지의 거리는 30~40리로 기록
- 여기서 일본 문헌에 나오는 '리'는 '해리'를 뜻 함 (일본 나름의 17세기 당시 '해리' 개념 1 해리 = 1.852km)
- 돗토리 번 문헌에 나오는 울릉도 ~ 독도간 거리 40~50리, 독도 ~ 오키섬 간 거리는 60~80리
- 안용복이 진술한 울릉도와(독도)간의 거리는 50리
- 이 거리는 당시 일본인들도 잘 아는 거리였으므로 안용복이 줄여서 말할 수 없었다고 판단
50리 = 50해리 = 50 * 1.852km = 92.6km
실제로 울릉도 ~ 독도 간 거리는 87.4km
숙종 실록 - 안용복이 대마도주의 죄상을 써서 에도막부에 올리려고 했다고 작성
원록 각서 - 안용복이 소송할 내용을 오키섬 민가에서 집필했다고 작성
=> 안용복이 오키섬에서 쓴 소장 = 대마도주의 죄상을 에도막부에 알리기 위한 소장이었을 가능성이 큼
1696년 원록 각서
-> 안용복의 비변사에서 한 진술이 진실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증명
3.'울릉도 쟁계'의 결말
1) 울릉도, 독도의 영유권은 조선에 있음
1696.1 - 에도 막부는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려 울릉도 뿐만이 아니라 독도에 대해서도 일본에서의 도해를 금지
1696.8
- 울릉도 도해 금지령이 돗토리번에 전달된 것은 1696.8
- 안용복 일행이 오키섬을 거쳐 돗토리번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은 후 에도 막부는 비로소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돗토리 번에 전달
- 안용복 일행의 도일은 '울릉도 쟁계'를 완전히 끝내는 데 기여
1699 - 17세기 말 조일 간의 '울릉도 분쟁'은 양국의 문서교환이 끝난 1699년에 모두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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