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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한국의 영토 2주차 - 일본의 한국 침략과 일진회

이게될까 2024. 9. 29.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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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시 - 러일전쟁 종결과 을사늑약

1. 러일 전쟁 종결과 코츠머스 조약

러일 전쟁 - 러시아의 국내 사정이 안 좋아 졌다. => 일본에 유리한 상황 
1905.1 - 러시아 정부가 다수의 민중을 살상하는 사건 == 피의 일요일  
러시아 민중 -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 러일 전쟁을 중지하길 원했다.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길 원했다. 
니콜라이 2세 - 황제에게 요구 BUT 발포! => 피의 일요일 발생

러시아 황제(신의 대리자)의 신봉이 약화 됨 -> 민중들 총 파업, 복지주의 확산 -> 헌법 재정 요구 ->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 1905.5 동해에서 러시아와 전쟁 시작 (동해 대전) -> 일본이 러시아 발틱 함대를 이김  -> 러시아는 패배와 압박 때문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1905.6에 전쟁 멈출 것을 요구 받음

러시아 - 전쟁을 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

일본 - 동해 해전은 이겼으나 무기를 다 사용하여 전쟁을 더 할 수 없었다. 

미국 - 중개자로서 일본의 판정 승을 서로 인정하도록 하였다. 
1905.8 - 러일전쟁 강화 회의(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시작 ) == 포츠머스 회의

1905.9.4 -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됨
일본 - 배상금 받지 못함
러시아 -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 하는 것 인정 
=> 러일 전쟁의 대가로 한국이 거래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제 2조
1.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 탁월한 이익을 가진다고 인정한다.
2. 러시아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어떤 지도, 보호 등의 조치를 취해도 그것에 간섭하지 않는다.

일본의 폭동 사태 - 배상금을 받지 못한다고 알게 된 일본 민중들이 유족들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킴
도쿄 히비야 공원 집회에 모인 민중들이 폭도화 -> 신문사, 내무대신 저택을 화공 -> 정부 계엄령 선포  (히비야 공원 화공 사건)
사망자, 부상자, 검거자가 다수 생겼으며, 요코하마, 고배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조약이 의회에서 승인된 1905년 10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강화 조약 반대 운동이 이어지고, 일본은 미국, 영국, 러시아, 청나라의 입을 막는데 성공하여 한국 보호국화에 대한 장애물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못했지만 전리품인 한국을 얻어, 한국에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을 조기에 강요했다.

 

일본의 '을사늑약' 강요 

1. 한국의 외교권 박탈 

1905.11 이토히로부미가 선두에 서서 대한제국 정부에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 

을사늑약 제 2조 - 외교권 박탈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 없이 어떤 국제적 조약, 약속도 체결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을 시행, 수행하는 임무가 있다.

그러나 이 조약문에는 조약 명칭과 황제의 직인이 없다.

1905.11.15 -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만나 한국의 위임을 받고,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행사함을 통보하고, 일왕의 결정이자 일본 제국의회의 결정임을 강조하며 폭언하고 위협함.

1905.11.17~18 - 왕궁인 덕수궁을 일본 군대가 포위하여 위협 연습을 하였고, 고종은 이토와의 면담을 거부하였다.

 

2. 을사 늑약 강요의 경위 

7명의 대신 중 태도 보류 4명과 반대하는 외부 대신 박제순을 찬성으로 주장하고, 국무회의 결정 형식으로 조약 체결을 선언했다.

을사 늑약 강제 체결의 무대는 덕수궁의 중명전이었다.

외부대신 박제순은 반대를 하다가 을사늑약을 일제의 강요로 맺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을사늑약에 대한 대신들의 상소문 

권중현 상소문 - 1905.11.25에 을사오적 중 한명인 권중현은 을사조약이 정해진 조약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점과 황제의 재가를 거치지 않고 조인되었다는 점을 지적함 

오대신 상소문 -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 측과 협상했다는 이완용 등의 변명 

1906.1.5 '오병서 등 상소문' - 오대신 상소문을 비판하고, 민중들에게 매국노라고 비판 받은 5대신이 황제에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쓴 사실을 지적하였다.

고종황제 - '오병서 등 상소문'에 답장을 주면서 상세하고 분명하며 조리가 있다고 긍정함 

1905.11.26 고종은 헐버트 특별 위원에 긴급 타전하여 "나는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한일 양구간에서 체결된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나는 이에 동의한 적이 없고 앞으로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취지를 미국 정부에 전달 해 달라.

묵살하는 태도 - 표먼적으로는 수많은 보호조약 반대 상소문을 거의 묵할하였다.
칭호를 추서하는 태도 - 분개하여 자살한 자에게는 충성, 애국 등을 나타내는 칭호를 추서하여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2차시 - 일본에 의한 한국 보호국화

1905.12.21 일본이 을사늑약 체결 후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통감부 - 한국 주사군(수비군)으로 사령관에 대한 지휘권을 소유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한국 주사군 - 한국을 제압하는 일본군
1904.2 한국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그 후 한국주사군으로 개편되어 한반도 제압의 선봉에 섰다.

지방 이사청을 전국 일곱 군데에 설치하여 지방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 시점에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1904.2 - 일본에 의한 한국 침략은 러일 전쟁과 함께 시작됨
1905.11 - 한국이 일본의 본호국이 된다.
1910.8 - 1907.7 내정까지 제압당한 한국은 1910.8 일본에 합병되었다.

 

일본, 독도 편입을 한국에 알리다.

1. 시마네현 관인들의 독도 시찰

1905.12 - 통감부 설치, 한국의 보호국화 : 일본이 독도 편입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1906.3 - 시마네현 관인들이 처음으로 독도를 시찰하고, 둘러본 다음 울릉도에 들러 울도군수 심흥택에 독도의 일본 편입을 구두로 전달하였다.

심흥택 울도 군수 - 본군 소속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 일본 관인 들이 시찰하러와서 그렇게 말했다. => 춘천 군수에게 보고서를 올림

춘천 군수 이명래 - 위 보고서를 한국의 정부에 올림

참정대신 박제순 - 지령 제 3호 하달
지령 제 3호 -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얘기는 전적으로 사실 무근, 일본인들의 행동을 주시하라

한국의 정부 - 독도를 한국 영토로 확인 

 

2. 박제순의 독도한국영토 주장의 의미

일본이 독도 편입을 빔밀리에 실행 - 한국이 1906.3에 와서야 일본의 독도 편입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06.3 한국의 정부, 강원도, 울도군 - 모두 독도를 한국 영토로 확인, 을사 오적들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주장

1905.2 일본이 독도 영토 편입 사실을 관보에 실었더라면 한국의 정부가 그 시점에서 일본에 항의 했을 것이 확실

이 때는 을사늑약 체결과 통감부 설치 등으로 인해 한국이 일본에 제대로 항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
최고 권위자 고종도 일본에 항의를 못 하는 상황 
- 침략에 의한 영토 취득은 무효 (1943 카이로 선언, 1945 포츠담 선언)

 

고종의 밀사활동

1. 할버트 박사를 미국으로 파션

을사 늑약이 체결된 당시에도 고종은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기 위해 호머 할버트 박사를 미국으로 파견
호머 할버트 박사 -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 필지와 최초의 영문 한국역사 책 한국사를 집필한 미국인이다.

시어도 루즈벨트 대통령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에 할버트와의 면담을 거절

할버트는 1907.3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고종에게 알림

 

2. 헤이그 평화회의 밀사 사건

1907.3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이 고종의 밀서를 갖고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출석함
을사늑약 체결이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을 만국에 알리고, 을사늑약 파기를 기도

회의 참가국들이 이를 거절해 밀서낭독은 회의장 밖에서 이루어졌다.

고종의 밀서 내용
1 황제는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았고, 국새도 찍지 않음
1 황제는 이 조약을 일본이 멋대로 반포하는데 반대
1 황제는 독립제권을 조금도 타국에 양여하지 않음
1 외교권에 관한 조약은 강제에 의한 것이고 내정에 관한 것도 일체 인정하지 않음
황제는 통감의 한국 주재를 허락하지 않았고, 황제의 권리를 외국인이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
세계 각국이 한국의 외교권을 공동으로 보호하기를 원한다.

 

3. 인민에 대한 고종의 칙서

1907.7.11 헤이그 밀사 실패 후 고종은 인민들이 의병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는 '칙서'를 공표하였다.

칙서 내용
3천년 강토가 하루 아침에 적의 땅이 되려하니 슬프다고 말하며, 불상한 인민들을 걱정하여 애통해하였다.
또한 의병을 나서길 촉구했다.

 

4. 일본에 의한 고종 퇴위

고종은 평화회의가 진행 중인 7.19에 일본에 의해 퇴위 당했다.

일본 사이온지 내각이 고종 강제 퇴위 결정 -> 이토 통감에게 권고 ->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으로 한국 내각이 고종을 대한 제국 황제 자리에서 퇴위 시킴

격노한 민중은 격렬한 항일 시위를 벌였다.
친일 단체 일진회의 <국민 신문사>와 경찰서 등 파괴, 이완용 집에 불을 지름

7.24 - 정미 7조약 성립
7.29 - 보안법 제정 : 집회, 결사 금지
7.31 - 한국 군대 해산 명령 공포

=> 전국 각지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남

 

 

3차시 - 친일 조직 일진회

1. 일진회 결성의 배경

러일 전쟁 중 일본군의 통역을 밭은 송병준이 일본의 영향 하 정치 개혁을 위한 조직을 개획
이 계획이 전 독립협회계 사람들에 의해 수용

일진회 결정
1904.8 송병준, 동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이용구와 정치결사 '일진회' 결성

일진회의 오판
한국 사회의 개혁은 한국인 스스로 하기 어렵다고 생각
일본과의 대등한 합방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
-> 외세를 끌어들이고 속은 결과로 끝난 큰 잘못

 

2. 송병준은 누구인가?

1857 - 출생
1871 - 무과에 합격, 사헌부에서 근무 
1884 - 갑신정변 후 조정의 밀명을 받아 김옥균 암살하러 도일 BUT 설득 당해 개화파의 동지가 됨. 귀국 후 투옥되었고, 출옥 후 흥해 군수 등을 역임했으나 다시 체포령이 내려져 일본으로 피신. 러일 전쟁 때 일본군 통역, 후에 '일진회' 조직
1907 - 헤이그 밀사 사건 때 고종의 양위 운동을 전개, 고종 퇴위시키는데 주력. 이완용 내각 성립. 농상공부 대신, 내상 등을 지내 '한일 합방 건의서'를 순종, 이완용 수상, 소네 통감에게 제출. 후에 합방이 아니라 병합으로 주장 바꿈. 한일 병합 후 조선 귀족으로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 일본의 백작이 됨

 

3. 이용구는 누구인가?

1868 - 양반 집안에서 태어남

1894 - 동학에 입교. 갑오 농민 전쟁 때 일본군과 전쟁을 치렀으나 러일 전쟁 때 친일파가 됨

1904 - 손병준과 함께 일진회 조직, 회장 역임. 후차례에 걸친 정치 개혁의 실패로 한국인 스스로 하국 개혁을 하기 어렵다 판단. 일본과 대등한 '합방'으로 개혁 가능하다고 오판. 아시아의 단결로 서양제국주의를 저지 및 한일군사동맹으로 한국의 부국강병이 가능하다고 믿음

1906 - 대등한 입장에서 '한일합방'을 처음으로 주장

1909 - '한일합방건의서'를 송병준과 함께 순종 등에 제출

1910 - 8월 한일 병합 후 일진회 회산. 한국과 일본의 대등한 합방을 주장 BUT 일본에 의한 한국이 일방적 병합

1912 - 일본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이용구는 병에 걸려 분사

 

우치다 료헤이는 누구인가?

1874 - 후쿠오카에서 무사의 삼남으로 태어남. 젊은 시절 한국 중국에 대한 일본의 세력확대에 강한 관심. 일본에 유학한 손문과 친교가 있었음. 손문의 혁명 운동 지원

1901 - 국가주의 단체 코쿠류카이를 결성

1906 - 한국 통감부 촉탁.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우너으로 방한

1907 -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한일 합방 운동 추진을 약속. 일진회 고문. 한일의 대등한 합방 주장

1909 - 한일 합방 건의서를 일진회로 하여금 제출. 한일 병합 후 일본 정부의 대한 정책에 비판적, 한국의 자치적 독립을 주장

 

5 일진회를 이용한 일제

개화파와 동학의 흐름에서 결성된 일진회
수구파 한국 정부에 대한 반대 세력 (일본의 협력 하 결성된 친일 단체)

일본과의 대등한 합바잉라는 일진회의 이념은 일본의 원류가 있음
- 일진회를 일본이 속인 것

1910 - 합방이 아닌 병합이 이루어지자 대부분 일진회 회원이 절망

1921 - 일진회 일본인 고문이었던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전 일진회 회원들로부터 자결할 것을 요구

 

6 아시아 주의란 무엇인가

1. 초기 1870
서양 열강에 대항하기 위한 한중일 단결론

2. 일본 맹주론
갑신정변(1884) 실패 ->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 조선과 청나라를 악우로 규정, 일본은 서양 열강과 행동을 함께함을 선언 -> 청일 전쟁 감행론, 조선 보호국화론 대두 - 이 시기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로 간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신질서 구축을 주장

3. 아시아 혁명 지원론
- 1881 결성된 겐요사는 황실 경애, 애국, 인권 존중 등을 신조로 조선, 중국, 인도, 필리핀 등의 혁명 운동 지원
-> 우치다 료헤이의 코쿠류카이는 겐요샤에서 파생된 단체

4. 대동합방론 (1893)
- 다루이 토키치의 주저서 
- 한일 양국이 대등한 합방을 이룩하여 대동이라는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주장
- 청나라와는 동맹관계를 맺고,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방어하고 아시아의 부흥을 달성하려는 사상
- 다루이에는 아시아 경시의식은 없었고 순수하게 대등 합방의 길을 모색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 일진회가 가진 이상

 

7 아시아 주의와 일본의 우익

아시아 주의 - 한중일 단결론, 일본 맹주론, 아시아 혁명 주의론
- 일본에 협력적인 각국의 혁명세력을 지원하여 아시아의 각국에 친일 정부 수집을 목표로 함
-> 아시아주의 세력이 바로 일본의 우익 세력
-> 대등합방론은 하나의 이상적인 사상에 불과 

일제와 코쿠류카이는 일진회를 한국의 혁명세력으로서 결정, 비호, 지원
- 일진회 사람들은 일본의 전략에 속아 넘어감

'아시아 주의'의 흐름이 후에 대동아 공영권 사상이 되었다.

 

8. 일진회의 규모

일진회는 당시에 대한제국에서 최대의 정치 결사 
- 일진회의 공표로 회원 숫자는 약 80 ~ 100만
- 사실은 4000명 정도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한국은 정당 정치 체제가 아니었으므로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이 민의를 반영한 것이 아니다.
- 일진회 자체가 민중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바독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한일 병합

1. 안중근의 의거

1909.10.26 0930 경
을사 늑약을 강제 체결시키고 초대 한국 통감으로 고종의 퇴위와 한일 병합을 추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의병 안중근에 의해 러시아 하얼빈역에서 사살

안중근은 일본과 전쟁을 벌인 한국 의병대의 한 병사로서 이토를 사살 

 

2. 이토의 암살과 한국 병합

이토 히로부미는 처음 한국을 보호국화 한다는 생각이었지 병합할 생각이 없었읍
BUT 한국에서 의병 투쟁이 격렬해지자 생각을 바꿈

1909.4 - 이토는 일본 정부의 한국 병합 방침에 동의

1909.7 - 일본 정부가 결정한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단행할 것이라는 방침에 동의. 일본이 한국 보호국화에서 한국 병합으로 방침 완전 전환

1909.10 - 한국 병합이 결정된 3개월 후 안중근에 의해 이토는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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