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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한국의 영토 - 1주차 러일 전쟁과 한반도

이게될까 2024. 9. 25.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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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유지 교수님 강의를 듣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Introduction

19세기말부터의 한국 역사를 진행한다.

1897년 대한 제국 선포 이후의 역사를 배운다.

 

 

러일전쟁과 한반도

대한 제국 선포와 독립 협회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 제국을 선포했다.

king Gojong에서 Emperor Gojong이 되면서 왕이 입었던 빨간색 옷에서 황제의 옷인 황금색 용포를 입게 되었다.

오랫동안 중국을 황제로 받아들였던 우리나라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미국, 영국, 일본, 러시아, 중국까지도 이 사실을 승인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은 항상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 청나라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을 일본 지배하에 두자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생각)

1894 ~ 1895 청일 전쟁을 이긴 일본은 한반도를 장악하기 더 쉬워졌다.

 

1876 2월 - 일본은 조선을 개항시키고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강화도 조약 - 조선은 자유로운 나라다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약화)
일본의 대륙 진출이 목표였고, 그것을 위해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이 해결해야 할 단계였다.

현재도 이러한 목표는 변함이 없다.

 

서재필 -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 
1895년 12월에 귀국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겨서 계기가 되었음 - 개화파가 다시 힘을 가짐 )
독립 협회 창립 -> 대한 제국 설립에 도움을 줌

1. 김옥균을 중심으로한 개화파의 일원이었으므로 개화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 청나라로 부터 자주독립이 목표였다. 
서재필이 독립 신문을 발행 
진정한 독립 국가가 되기를 염원했다. -> 독립 협회, 독립신문 등 독립을 즐겨서 사용 

 

대한 제국의 전체를 결정하는데 있어 독립 협회는 입헌 군주제를 원했다.

입헌 군주제 - 왕, 황제를 두지만 헌법을 제조하여 의회를 설립, 헌법에 의한 군주의 권한 행사 가능 -> 법이 우선시

서구 파는 전제 군주제를 원했다.

전제 군주제 - 군주의 독제를 허락하는 제도 -> 법 위에 황제 

 

일본 - 명성황후 시해 => 민심을 잃어 조선 땅에서 밀려난다. 
러시아 - 미시 로젠 협정 = 대한 제국에 간섭하지 않겠다. 

6년간 대한 제국에 간섭할 수 없었다.

1898.10.29 - 독립 협회는 입헌 군주제를 이루자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 
- 입헌 군주제를 이루기 직전까지 진행 
- 6개의 조항 = 헌의 6조 - 고종은 다 허락했다.

서구파는 고종에게 독립 협회를 좋지 않게 말한다 -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황제 폐위, 공화정 실시를 위한 것이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독립 협회에 가입되었으나 황제 폐위에 대한 혐의로 사형까지 몰렸었다.

이러한 대립으로 인해 고종은 독립 협회를 다 체포하고,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헌의 6조는 폐지되었다.

만약 이때 입헌 군주제가 결정되고, 의회가 만들어졌다면 일본이 쉽게 침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협회라는 서구파의 단체와 독립 협회가 계속 대립하고, 혼란이 지속된다.
-> 고종은 두 협회를 해산하라고 명했고, 근대화는 멀어졌다.

이러한 대립이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요약 - 대한 제국의 선포와 독립 협회
1897 대한 제국 선포
1894 ~ 1895 청일 전쟁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를 먹는 것이 목표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 협회 - 개화파 사상의 영향을 받아 청나라로부터 자주독립을 외치며 독립신문도 창간 

독립 협회 VS 서구파
입헌 군주제 - 전제 군주제 -> 대한 제국 전체에 대한 대립으로 갈등이 점점 심해짐
만민 공동회에서 발의한 헌의 6조를 고종이 받아들였으나 서구파의 갈등으로 인해 다 폐지됨 

 

2차시 - 러일 전쟁과 한국 

1. 삼국 간섭

2. 러일 국결 단절 

3. 러일 전쟁과 한일 위정서 

4. 한국을 장악해 가는 일본

5. 제1차 한일 협약과 한국 - 1904부터 시작된 일본의 한국 침략 

 

일본의 러일 전쟁 승리 계기 - 청일 전쟁 직후에 러시아에 적대감 생성
러시아가 주도하고 독일, 프랑스가 일본에 간섭을 하는 사건이다.
1895.4.23 - 삼국 간섭 시작
조선이 모르게 조선의 운명을 앞당겼다.

일본이 청일 전쟁 승리 후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받은 뒤 삼국이 청나라에게 돌려달라는 간섭을 진행한 것이다.
이유 - 요동반도에서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이 가깝기 때문에 일본군이 주둔하면 청나라에 위협적이고, 조선도 주변에 있기 때문에 독립이 위태로워진다. 

일본은 삼국의 간섭을 이길 수 없었고, 러시아는 청나라에게 요동반도를 빌리고, 독일과 러시아는 청나라로 부터 많은 이권을 챙겼다. -> 결국 이권 챙기기였다.

북경과 한반도 모두에 가까워 삼국은 명분을 앞세웠다.

 

일본은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줬고, 가신쇼우탄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가신쇼우탄 = 와신상담 - 솥에 눕고, 쓸개를 씹는다 == 원수에게 갚기 위해 참고 견딘다.
-> 대단히 분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참고, 러시아를 이겨버리자 

일본은 청나라를 이겨서 얻은 배상금을 군비 확장에 모두 투입하여 전쟁을 준비한다.

러시아는 1898년 청나라와 밀약을 맺어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요순, 태령을 빌렸다. 
또한 태평양 함대 기지를 건설하는 등 만주에 대한 진출을 가속화했다.
-> 일본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었다. - 러시아를 적국으로 인지 

일본의 민간인 - 민감하게 반응!
시베리아 철도가 연결된다 ->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목소리 강화된다. -> 일본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남만주 철도가 태릉까지 연결이 예상되면서 일본이 대단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러일 국교 단절, 위화단의 난

1900 - 청나라에서 그리스도교에 세력에 반대하는 위화단의 난이 발생 -> 연합 8개국(일본이 포함)과 청나라가 전쟁을 감행 -> 2달 만에 청나라가 패배 -> 청나라의 분할 가속화 

러시아 - 만주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켜 점령 상태를 이어감 -> 미국, 영국, 일본이 철수시키라고 요구 

1902 -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만주를 점령 중 -> 영일 동맹을 통해 러시아 제지 (일본을 대리전쟁 수행국을 내세움) -> 러 일 전쟁 시작엔 미국과 영국이 있었다.

1903.8 -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의 교섭 시작 -> 일본은 한반도를 가지고 싶었고, 러시아가 만주를 가질 것을 제안 -> 러시아는 북위 39도 이후를 군사적 중립 제대로 두자고 요구 ->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음
한국을 무시하고 이런 제안이 오갔음 

1904.1.23 - 대한 제국은 중립을 선언 -> 대한 제국을 무시하던 미, 러, 일, 영들이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협상을 벌였다. -> 열강들의 파워 게임의 희생양이 되어가고 있음

 

러일 전쟁과 한일 의정서 

1904.2.6 -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 단절 통보 

1904.2.8 - 일본이 러시아 군 기습 공격 

1904.2.9 - 일본 1개 사단이 한국 서울로 향함 - 서울 왕궁 점령

1904.2.12 - 청나라가 국외중립 선언 - 러일 전쟁 간 개입하지 않겠다.

1904.2.23 - 일본에 한일 의정서 체결 강요 -> 강제 체결

한일 의정서  
제3조 - 대 일본제국 정부는 대한 제국의 독립 및 영토 보존을 확실히 보장한다. ->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존 = 한국을 침략하지 않겠다.

제4조 - 제3국의 침략이나 내란으로 인해 대한 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존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 일본 제국 정부는 속히 임계 응변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 대한 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편의를 제공할 것. 천왕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전략상 필요한 곳을 점령할 수 있을 것 
일본은 필요시 한국의 모든 영토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보급화, 식민지화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러일 전쟁을 위해 물자 보급 창고를 만든 것이다.  

제5조 -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서로 허가가 없이는 이 협약을 위반하는 타 나라 와의 협약을 체결할 수 없다.
을사조약에서 나온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1904 한일 의정서를 강요하면서 한국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을 장악해 가는 일본 

러일 전쟁의 목적 - 대한 제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 == 군사력을 한국에 배치 

1904.3.11 - 일본 군인으로 구성된 한국 주둔군을 창설. 사령부를 서울에 배치. 이토히로부미가 한국에 등장

1904.5.18 - 일본은 대한 제국에 한국 러시아 간 조약을 폐지 강요 

이토히로부미 - 한국 침략의 원흉
1909.11.26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
1868 ~ 1912 메이지 시대 (근대화) - 총리를 여러 차례 역임하는 등 일본에 공헌을 많이 한 인물 
한국 통감이 된 이후 한국 침략이 원흉이 되었다.

 

제1차 한일 협약과 한국 

1904.8.22 일본이 대한제국에 제 1차 한일 협약 강요

일본이 지정한 인물이 외교를 담당할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제3 조항 - 한국 정부는 외국과의 조약 체결, 중요한 주요 안 결은 일본 정부와 협의해야 한다. 
1905.11 을사 늑약 - 한국 외교권 박탈 => 비슷한 내용이다.
러일 전쟁 중이었으나 대한 제국은 일본 점령하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1904.2 한국에 대해 침략적인 조약을 맺었다. - 거부권 행사를 할 수 없었다.
일본의 한국 침탈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종은 밀사 활동을 시작 

 

Summary 
삼국 간섭과 청러 밀약 - 러 독 프 삼국이 일본에 간섭하여 요동반도 회수 및 이권 침탈 -> 일본이 러시아를 적국으로 인지
위화단의 난, 러일 교섭 - 일본과 영국이 러시아 남하를 막기 위해 동맹 채결. 러시아 일본이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교섭 진행. 1904.1.23 러일 전쟁 기운이 돌자 한국 중립 선언 BUT 무시
러일 전쟁과 한일 의정서 - 1904.2.23 한일 의정서 채결 강요 제 3조는 좋은 항목이었으나 제 4조의 필요시 토지, 시설 사용 가능하게 한 것과, 제 5조의 외교권 박탈로 인해 침략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한국 지배 - 1904.3.11 한국에 군대 진입. 1904.5.18 한러간 모든 협약 폐기 시킴
1차 한일 협약과 한국 - 1904.8.22 한일 협약 강요하여 외교 고문을 일본에 의해 뽑게 됨

 

3차시 - 러일전쟁과 독도

1. 독도 편입이 필요했던 일본 - 1905

2. 독도 편입에 반대한 일본 내무성

3. 독도 편입을 격려한 일본 외무성

4. 독도를 주인 없는 땅으로 변환한 일본

5. 일본의 한국 침략을 승인한 영국과 미국 

 

1. 독도 편입이 필요했던 일본 - 1905

러일 전쟁 중 독도 편입이 필요해졌다. - 당시 독도를 일본이 편입했다고 주장

1905년 독도 편입이 왜 필요했는가?
독도가 러일 전쟁의 활용되기 좋았다. 동해에서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려고 하였다.

 

2. 독도 편입에 반대한 일본 내무성

나카이오 사브로 - 1903년부터 독도에서 물개를 잡기 시작했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한국에 독점적으로 본인에게 독도를 빌려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

기모스케 겐코 -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알고도 러 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독도를 주인 없는 땅이라고 말을 한다.
먼저 일본 영토로 편입을 진행하여 망루를 설치하려고 했음 

1905년 일본 한문당이라는 출판사가 만든 조선 지도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시가 되어 있다.
이 지도 뿐만이 아니라 여러 조선 지도에도 한국 영토로 적혀있다. - 일본인들도 알고 있다. 

내무성 - 독도를 편입하자는 의견을 반대했다. == 한국 영토일 가능성이 높다. => 한국 영토를 함부로 가져가면 영국과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편입할 수 없다. - 돌덩어리 섬을 굳이 가져올 필요 없다.

 

3. 독도 편입을 격려한 일본 외무성

내무성은 독도 빌리기를 거절한다.
외무성은 내무성과 반대 입장이었다. - 빨리 제출하라고 제촉

외무성 - 시국이 시국인 만큼 독도의 망루, 해저 전선을 설치해야 한다. -> 러시아 함대 관측 가능하다. -> 빨리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야한다. 

 

4. 독도를 주인 없는 땅으로 변환한 일본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현 오키 섬으로 비밀리에 편입 - 반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비밀리에 진행(내무성이 우려한 부분)

1905.1.28 - 일본의 내각 칸요회의에서 독도를 주인이 없는 땅이라고 규정 -> 다케시마라는 이름을 붙여 시마네현에 편입 
서양 열강이 알 수 없도록 아주 조그맣게 고시했다. 1905.2.22

비밀리에 편입시켰기 때문에 일본인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일본이 먼저 장악했다라고 논리를 만들어서 편입시킨 칸뇨회의 결정 문서이다. 

일본 자료에 의하면 독도에 망루를 세우겠다는 것이 있다.
1905.7.25 -> 1905.8.19에 제작하여 감시를 시작하였다. - 그러나 이 시점은 동해 해전이 다 끝난 이후였다.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추정 그러나 망루가 세워진 것은 사실이다.

1905.6을 기점으로 울릉도 -> 독도 -> 오키섬 을 해저 전선으로 연결시켰다. - 한일 의정서 제4조에 의함 -> 전쟁을 위해서 일본은 한국의 모든 시설, 토지를 사용 가능하다.

일본군이 독도에 망루를 세우고, 해저 전선을 세웠음에도 한국이 항의하지 않아서 묵인하고, 승인해준 것이다 - 일본의 억지 
한국은 독도를 편입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 비밀리에 진행했기 때문에 알리지도 않았다.
한국은 1906.3 독도 편입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 바로 한국 영토라는 것을 확인 

1905.7 ~ 8 시점에 한국은 독도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을까? - 일본은 한일 의정서 제4조를 통해 한국 영토를 빌려서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라 항의할 필요가 없었고, 제3조에서 한국 영토를 침입하지 않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킨다고 본 것이다.

 

5. 일본의 한국 침략을 승인한 영국과 미국 

서양 열강들은 일본의 독도 편입, 한국 침임을 항의하지 않도록 일본이 외교에 주력을 했다.

1. 영국, 미국과 밀약을 진행 

1905.7 - 가츠라 데프트 밀약. 미 일 조약 
미국은 일본이 한국 지배하는 것을 승인 and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승인 
영국은 알고 있었고, 영일 동맹을 위해 승인했다.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무슨 짓을 해도 항의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한 것이다.
일본 내무성의 걱정을 없애기 위해 외교로 해결을 했다.

한국의 운명을 미, 영, 일이 먼저 결정했다.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미국과 영국도 큰 책임이 있다. - 영국과 미국은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많이 지원하여 책임을 동감하며 도왔다. -> 일제 시대 때 이루어진 한반도 분단도 미국과 영국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1905.11 - 을사늑약 ->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을 완벽하게 침략할 수 있었다. 
외세에 침략당하지 않도록 힘을 키웠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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