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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한국의 영토 11주차 - 강점기 이전의 독도

이게될까 2024. 12. 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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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시 - 울릉도사적

1. 장한상의 울릉도사적

1) 조선왕조, 장한상을 울릉도로 파션

17세기 말 울릉도 분쟁
조선 왕조는 장한상을 울릉도로 파견

1969.09.19 - 삼척 출발
0920 ~ 1003 - 울릉도에 10여일 체류하면서 울릉도를 살핌
1006 - 삼척으로 돌아옴 

이 기록을 울릉도사적에 기록 

 

2) 울릉도사적 독도관련 부분 국역

서쪽을 바라보면 대관령의 구불구불한 모습이 보이고, 동쪽을 바라보면 바다 속에 한 섬이 보이는데, 아득하게 신 방향에 위치하여 그 크기는 울도(=울릉도)의 0.33 미만이고, 거리는 300여리에 불과하다.

 

3) 울릉도 사적 해설

장한상이 울릉도 신 방향, 즉 동남동에 본 섬은 바로 독도다.

울릉도와 독도 간 거리
장한상 - 300리(120km)
실측 - 90km에 가까운 수치

독도의 크기
장한상 - 울릉도의 0.33미만
실측 - 울릉도의 약 1/300, 0.33미만인 것은 틀림없음
-> 장한상은 독도를 상당히 크게 봄

일본 측은 장한상이 섬 이름을 쓰지 않았기에 그가 영유권을 주장했다고 할 수 없다고 비판

장한상이 한 관리로서 독도를 목격한 그대로를 기록
- 그가 독도를 일본의 섬이라고 생각했었다면 그렇게 기록했을 것

바로 그는 이름은 쓰지 않았지만 울릉도에 속하는 섬으로 독도를 기록했다고 판단

 

2. 18~19세기의 독도

1) 스토관 파견

조선왕조는 18세기에 3년에 1번씩 조사단을 울릉도에 파견
- 수토관이라 칭함

3년에 1번씩 울릉도와 그 주변을 수색한 이유
- 울릉도 쟁계가 일어난 이유가 오랫동안 울릉도에 관리 파견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

 

2) 잘 통치된 18세기의 울릉도

수토관 제도 덕분에 18세기에는 울릉도, 독도 문제가 발생X

수토관은 울릉도에서 인삼이나 산삼을 캐 본토로 가져감

 

3) 산 봉우리가 그려진 우산도

조선 지도에는 우산도에 산봉우리가 그려지기 시작
- 울릉도 동쪽 2km 거리에 있는 죽도와 우산도(독도)를 구별할 수 있는 표시

죽도에는 산봉우리가 없고, 독도에는 있기 때문

'해좌전도'의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부분 중 독도엔 산 봉우리가 있다.

 

4)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61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완성

그러나 한국에 현존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우산도(독도)가 없음

그러나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동여지도에는 우산도가 그려져 있음
-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명 X
- 한국 측에 남아있는 대동여지도 판에 지도를 맞추었을 때 우산도 부분을 제외시켜 버린 것이 아닐까 추정

김정호는 우산도(독도)를 그의 지도에 그린 것이 사실 

 

5) 18~ 19세기 조선의 독도 인식

수토관을 파견하여 울릉도와 그 주변 도서에 대한 지배 강화
- 우산도 = 마쓰시마 라는 인식이 중앙에서 생김
- 동국문헌비고, 민기요람 등에 그 사실이 기재

18세기 초 울릉도 동쪽 2km 거리에 있는 죽도와 독도의 구별을 잘 못하는 혼란이 한 때 야기되었으나 그 후 조선 지도에는 산 봉우리가 있는 우산도가 그려지기 시작.

죽도에는 산봉우리가 없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죽도와 독도를 산봉우리로 구별 

 

2차시 - 울릉도

1. 울릉도 이주 정책

1) 울릉도 무인도 정책의 종언

1800년
- 조선 왕조는 울릉도에 약 80년간 수토사를 거의 파견하지 않았음 (1840년대에 한번만 파견)
-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몰래 울릉도에 들어가 거주하기 시작

1882년
- 일본인 약 250명이 울릉도에 거주
- 조선인들도 약 40명 거주

1883년
- 보고를 들은 고종은 울릉도에 대한 무인도 정책을 바꿔 1883년 울릉도 이주 정책을 채택
- 태종이 울릉도를 비우라고 명령한지 480년만의 정책 변경
- 고종은 울릉도와 그 주변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이명, 현지로 파견

 

2) 고종의 독도 인식

고종은 이규원에게 울릉도는 세 섬, 즉 '울릉도', '송죽도'(=죽도), '우산도'라고 함

고종은 이규원에게 세 섬을 조사해올 것을 명함
- 이 때 우산도는 독도다

고종은 특히 '만기요람'등을 즐겨 읽었기 때문에 이런 문헌들을 통해 우산도의 존재를 잘 알았음

 

3) 사라지는 독도의 옛이름 '우산도'

이규원
- 우산도란 울릉도의 옛이름이라고 하면서 울릉도 여펭는 송죽도 밖에 없다고 답함

고종
- 이규원의 말을 일부 수용하며 세 섬이 존재한다고 다시 말함
-> 우산도(= 울릉도)와 죽도와 송도를 통칭하여 '울릉도'라고 한다.

여기서 원래 독도를 '우산도'라고 호칭해 온 관습에 변화가 생김
- 사실상 '우산도'라는 독도의 옛 명칭은 여기서 사라짐

독도라는 명칭이 생기는 계기가 마련 

 

2. 울릉도로 이주한 사람들

1) 일본인들 일본으로 귀환

조선왕조 - 일본정붑에 연락해 울릉도에 무단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전원 본국으로 데려갈 것을 여구

일본 정부 - 배를 보내 250명 전원을 일본으로 데려감

 

2) 울릉도 이주 정책 개시

조선 왕조는 울릉도에 무단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용서해 그대로 거주

울릉도 이주자를 모집해 결과적으로 120명의 주민이 생김

대부분이 전라도 출신 자 
- 해류가 전라도 쪽에서 울릉도로 흐르고 있어 역사적으로 전라도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울릉도로 갈 수 있었음

 

3) 독도라는 명칭의 기원

거주자들이 독도를 '돌섬'이라고 부르기 시작
- 전라도 방언으로 '돌'을 '독'이라고도 하기 때문
돌섬 -> 독섬 -> 독도
- 현재 '독도'라는 명칭이 생김

중앙에서는 '돌섬'을 한자로 표기해 '석도'라고 표기

 

3. 대한 제국 칙령 제 41호

1) 칙령 제 41호 반포

1897년
- 대한 제국 건국
- 고종이 황제가 됨

1900 - 대한 제국은 칙령 제 41호를 반포해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울도군'으로 명명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여 도감을 군수로 개정

구역은 울릉도 전체, 죽도, 석도를 관할

관보에 실려 세계적으로 공표

 

2) 고종의 울릉도 3도론을 구현한 칙령 제 41호

1882년 고종은 울릉도가 세 섬이라고 강조 
1. 울릉도 + 송죽도(죽도) + 우산도(독도)
2. 우산도(울릉도) + 죽도 + 송도(독도)

고종의 인식이 1900년 대한 제국 칙령 41호의 울도군 범위에 영향을 줌
울도군 구역= 울릉도 + 죽도 + 석도

 

3) 일본 군함 독도 명칭을 확인

1904.09.25 군함 니다카 일지에 독도 명칭을 사용
한인 이것을 독도로 쓰고 본방 어부 등이 줄여서 리안코도로 칭함

1905 일본에 의한 독도 시마네현 편입보다 앞선 1904 독도라는 명칭으로 한국이 독도를 실효 지배한 사실이 확인

 

 

3차시 - 일본에서의 독도

1. 부산(일본) 영사관 보고서 속의 독도

1) 부산 영사관 보고서 속의 울릉도

1899년 
- 부산 일본 영사관은 19세기 말부터 조일 간의 거래에 대한 기록을 다수 남김
- 1899년 기록에는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일본으로 어패류 등을 수출할 때 울릉도감에게 수출세를 냈다는 내용이 있음 

일본인들 사이에 조약문이 있다. 2%를 수출세로 낸다.

1899년 수출세에 관한 부산 일본 영사관 보고서의 내용
- 일본인들이 울릉도감과 조약을 맺고 울릉도로부터 일본으로 물건 수출할 때 수출액의 2%를 콩으로 수출세를 냄

과세 행위는 실효 지배의 증거

일본인들이 독도에서 잡은 어패류 등을 일본으로 수출할 때 세금을 낸 기록이 있는가가 관건

 

2) 1902년의 부산 영사관 보고서

1902년
- 울릉도와 독도를 왕래하면서 독도에서 전복을 채취한 사람들의 기록 존재
- 울릉도에 도항한 일본인들 중 독도까지 가서 전복을 채취한 다음 울릉도로 돌아와 그것을 일본으로 수출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록

<출어해 가는 자>를 '한국인'으로 해석할 경우
- 1905년 이전에 한국이 독도를 전복 채취하는 형태로 실효지배 했다는 증거
- 일본인으로 해석할 경우 일본인들이 독도로 가서 전복을 채취하여 4-5일 후에는 울릉도로 귀항했다는 뜻이 됨
- 이 후 일본인들은 독도의 전복을 일본으루 수출하여 울르옫에 수출세를 냈다는 얘기가 됨

1905년 전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 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수출세를 냄

독도는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섬

 

2. 일본 책 속에서 독도는 한국 땅

1) 한해통어지침 1903

한해(한국의 바다)에서 어업을 하기 위한 지침서
- 얀코도(독도)가 '한해'에 속하는 섬으로 기재, 한국 땅임을 분명히 함
- 독도의 강치를 독점적으로 포획한 나카이 요자브로의 친구인 마키 보쿠신 농산무성 수산국장이 이 책의 서문 작성

 

2) 최신 한국 실업 지침 1904

1904년에 출간, 한국 실업(한국 내 실업)에 대한 지침서
- 독도가 한국 내의 섬으로 기재
- 독도 일본 편입을 주장한 야마자 엔지로 외무성 정무국장이 이 책의 서문 작성

 

3) 다부치 유사이 저 한국 신지리 1905

독도를 울릉도 항목에 포함시켜서 한국 영토임을 보여줌

 

3. 일본의 각종 지도에 독도는 없다.

1) 소학 필휴 일본 전도

1877년
-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 소학교에서 주로 사용된 일본 지도
- 일본의 북서쪽 한계는 오키섬으로 되어 있고 독도는 제외

 

2) 대 일본 전도 1877

독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 

 

3) 대 일본 국 전도 1881

독도 제외 

 

4) 대 일본 제국 전도 1897

울릉도, 독도는 한반도와 같은 하얀색, 독도 이름을 러시아명으로 기재

독도의 동도를 올리부춰, 서도를 매넬라이로 기재
-> "이러한 지도들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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