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시 - 한 일 양국의 독도 영유권
한일 양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
1) 개요
일본 정부 - 1954.07독도를 일본 영토로 주장하는 의견서 제출
vs
한국 정부 - 응수
당시 한국 측이 주장한 내용을 포함, 17세기의 울릉도 분쟁 이 후 20세기 초까지의 독도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을 고찰
2) 개정 일본 여지 노정 전도 (1779)
18세기 이후 일본이 작성한 모든 공식 지도
- 독도를 조선 영토 혹은 일본 영토 외로 기재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 1779년 에도막부의 친번 미도번의 학자 나가쿠보 세키수이가 작성한 사찬 지도였는데 후에 관허 지도가 됨
- 울릉도와 독도가 기재, 일본 측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주장할 때 이용하는 지도
-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조선의 남단도 그려져 있고, 경위도선이 그어져 있음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의 울릉도 독도 부분
- 고려(조선)를 본다면 마치 운주(이즈모)로부터 은주(오키섬)을 보는 것 같음
- 이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남단과 같이 흰색으로 그려짐
- 울릉도와 독도는 같은 수역에 그려짐
- 이 지도가 작성된 1779년엔 이미 울릉도가 조선 섬이라고 1696년 일본이 인정한 후임
"독도가 울릉도와 같은 수역에 같은 색깔로 그려진 것은 독도가 조선 섬이라는 뜻"
- 지도의 조선 남단과 울릉도, 독도에는 일본 본토에 그어진 경, 위도선이 없다.
- 울릉도와 독도는 바로 일본 영토 외의 땅이라고 강조
- 울릉도와 독도 옆에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 <은주시청합기>의 한 구절이 기재 되어 독도가 조선땅임을 강조
고려(조선)를 본다면 마치 운주(이즈모)로부터 은주(오키섬)을 보는 것 같음
- 독도가 그려진 일본 지도지만 독도는 정확히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3) 삼국 접양 지도 (1785)
1785년 일본의 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삼국 접양지도'를 작성
-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접속되는 모양
- 그림 가운데 두 섬이 그려져 있는데 그 왼쪽에 '조선의 소유'라고 적혀 있다.
큰 섬이 죽도로 쓰여져 있다.
- 이 것은 울릉도를 뜻함
- 당시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죽도로 불렀기 때문
두 섬 아래의 문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음 (이 섬에서 은주(오키섬)를 바라보고 조선도 본다)
- 이 글은 <은주시청합기>의 문장을 모방해서 만든 글임
- 죽도(울릉도) 옆에 작은 섬이 있다.
하야시 시헤이가 삼국 접양지도를 작성했을 때 한반도 부분을 '조선팔도지도'라는 지도를 참고로 썼다고 밝힘
- '조선 팔도 지도'를 보면 동해에 울릉도가 그려져 있다.
- 삼국 접양지도의 한반도 동쪽에 그려진 섬은 울릉도
- 결국 삼국 접양 지도에는 두개의 울릉도가 잘 못 그려져 있다.
하야시 시헤이는 '삼국접양지도'의 일본 부분을 작성했을 때 나가쿠보 세키수이의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를 참고로 했다고 그의 저서 삼국 도설(1785)에서 밝힘
삼국 접양 지도는 삼국 도설에 첨부 지도다.
조선 팔도 지도 + 개정 일본 여지 노정전도 = 삼국접양지도
하야시 시헤이의 말을 분석하면 '삼국접양지도'의 한 가우데 있는 죽도(울릉도)와 그 옆에 있는 작은 섬은 바로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의 죽도와 송도(독도)라는 말
- 독도를 한국 영토로 기재 = 조선 영토로서 노란 색으로 정확히 그려져 있다.
'삼국접양지도'는 1854년 에도 막부에 의해 일본 '공식 지도'가 되었다. = 공식 지도가 독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
4) 죽도방각도(1838)
1838 일본 세키슈(현 시마네 현의 일부)의 아이즈야 하치에몬이라는 사람이 울릉도 도해하여 밀 무역 한 죄로 사형
이 기록에 의하면 하치에몬은 송도(독도)에 도항한다는 명목으로 울릉도까지 동항하여 밀무역을 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짐
일본인들은 울릉도에 대한 도해가 금지된 후에도 독도에 대한 도해는 금지 되지 않았다고 주장
-> 일본인들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자료로 이 기록을 언급
하치에몬의 재판 때 사용된 지도 '죽도방각도'를 보면 독도(송도)는 울릉도, 조선과 같은 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음
오키 섬이나 일본 본토는 노란색 BUT 독도는 조선 영토로 정확히 구별
=> 재판에서 사용된 일본 공식 지도가 독도를 조선 영토로 명백히 식별
=> 재판에서도 언급이 없었으므로 일본 정부는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했다.
5) 일본변계약도(1808)
에도막부의 천문방(지도제작 책임지는 관리) 다카하시 가게야스는 공식 지도 '일본변계약도'를 작성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완릉도와 천산도라는 명칭으로 그려짐
완릉도는 울릉도이고 중국에서 바뀐 이름
천산도는 우산도의 우 자를 천 자로 잘못 본 결과로 생긴 명칭
'일본변계약도'의 울릉도와 독도 부분은 중국 지도를 원본으로 만들어졌다고 추정
완릉도 = 울릉도
천산도 = 우산도 = 독도
6) 대일본연해여지전도(1821)
일본의 천문학자 이노 타다타카는 약 20년을 들여 일본 전국을 측량해 당시로서는 매우 정교한 일본 전도를 제작
이노 타다타카의 지도 제작 작업은 5차 작업으로부터 에도막부가 전면적으로 지원하는 공식 사업
그의 사후 1821년 그의 제자들이 측량 결과를 정리해 '대일본연해여지전도'를 에도막부에 제출
- 이 공식 지도에는 독도가 포함되지 않음
에도 막부는 독도 측량 명령을 이노 타다타카 측량대에 내리지 않음
일본 측은 이노가 병을 앓았기 때문에 독도에 가지 않았다고 하나 그는 병을 앓고서도 측량대를 오키섬까지는 보냈음
에도 막부가 독도 측량을 지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본질, 그것이 에도 막부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생각하지 않닸다는 증거
2차시 - 일본에서 독도
1. 1870 외무성 문서
명칭 :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
1868년
-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제 국가를 만들었음
- 조선은 새로운 일본을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로 생각해 받아들이지 않음
1870년 - 다케시마와 다쓰시마가 조선의 부석이 된 경위
- 일본 외무성이 원록년(1688 - 1704)에 다케시마(울릉도)와 다쓰시마(독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경위를 일본 정부에 보고
"원록년 간에 울릉도 독도는 조선의 부속이다"
17세기 말 안용복 납치 사건을 계기로 조일 간에서 일어난 울릉도 분쟁을 가리키며 당시 두 섬이 조선의 부속이 되었다는 내용
2. 일본 외무성, 우산도 = 마쓰시마로 확인
1876년 - 일본 외무성 내에서 마쓰시마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때 다나베 타이치 국장이 '마쓰시마는 조선의 울릉도에 속하는 우산'이라고 정확히 지적
3. 두 섬의 명칭 혼란
17세기 말 - 일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 이래 약 200년 간 두섬에 가지 않음
19세기 후반
- 일본인들은 두 섬의 명칭을 잊어버린 상태가 됨
- 많은 일본 서민들이 울릉도를 마쓰시마라고 부르기 시작
일본에 머물렀던 네덜란드인 필립 시볼트는 네덜란드로 귀국해 1840년에 일본과 그 주변도라는 지도를 출간
그 지도에는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표기
시볼트는 울릉도와 독도를 그렸으나 경위도를 잘 못 기재
- 울릉도 위치에 마쓰시마를 그렸음
시볼트의 지도가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마쓰시마라 부르기 시작
많은 일본 서민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잊어버린 상태였기 때문
4. 외무성의 명칭 조사
1) 요점
1876년 - 외무성 기록국장 와타나베 히로키는 다케시마와 마쓰시마의 관계 조사
1. 고래 일본에서 '다케시마'라고 불린 섬은 조선의 울릉도
2. 일본에서 이전부터 '마쓰시마'라고 불린 섬은 서양에서 명명한 '호넷 락= 리랑쿠르 락=독도' 다
3. 유럽인은 일본이 이전에 '다케시마'에 '마쓰시마'라는 명칭을 붙였고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섬에 '다케시마' 명칭을 붙여 혼란이 야기
4. 분명치 못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시마네 현에 조회하고 함선을 현지에 파견, 조사
이렇게 하여 외무성은 일본의 내무성에 의뢰하여 시마네현에 조회하여 두 섬에 대한 조사 진행
5. 태정관 지령문
내무성은 조사 결과를 정리해 당시 일본의 최고 행정 기관이었던 태정관에게 보고
1877.03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 외'임을 명심하라는 지령을 내림
1877 일본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님을 공식 확인
- 일본해 내 다케시마와 그 밖에 있는 한섬(독도)은 원록 5<1652>년 조선인이 입도한 이래 드디어 본방과 관계가 없어졌다.
- "다케시마와 그 밖에 있는 한 섬(독도)의 건은 본바오가 관계가 없음을 명심할 것 "
이소타케시마의 약도를 보여주면서 울릉도와 독도가 말한 섬임을 보여준다.
- 1877년 이 두 섬이 일본땅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조선의 부속으로 일본 정부가 결론을 내렸음
일본 정부는 현재 태정관 지령문 열람을 제한해버린 상태
필사본에는 '이소타케시마 약도'를 첨부하지 않음
태정관 지령문은 판례 등을 통해 현재까지 유효한 문서
일본 국회에서도 2006, 2009 이문서에 대해 질문이 있었음
- 조사 중으로만 대답하여 정확한 답변을 계속 회피하는 일본 정부
결론
- 일본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두 섬이 17세기 말에 조선 영토가 된 사실을 확인
-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일본 영토가 아니니 욕심을 내지 말아라'라는 지시를 내림
3차시 - 울릉도 조사
1. 군함 아마기의 울릉도 조사
1) 외무성 와타나베 국장의 속셈
1877년
- 일본의 최고 행정 기관 태정관이 독도가 일본 영토 외임을 명심할 것을 지령
- 그러나 외무성의 와타나베 국장은 울릉도에 군함을 파견하여 조사 = 울릉도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었다.
-> 만약 조선이 이미 손을 쓴 곳이라면 통치의 상황을 실사하여 그 다음에 방책을 정하는 것이 필요
와타나베 국장 - 울릉도가 조선 땅이라고 해도 다른 방책을 생각하자
=> 독도 뿐만이 아니라 울릉도를 조선에서 뺏을 생각을 피력한 말
1880년 - 외무성은 울릉도에 대한 군함 파견을 감행
2) 아마기의 울릉도 조사
군함 아마기는 울릉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울릉도 동쪽 2km 거리에 있는 죽도를 발견
죽도라는 이름은 한국인들이 망명한 이름 - 일본 발음으로 다케시마
조사를 한 해군성은 원래 다케시마라고 일본에서 부른 섬이 울릉도 동쪾 2km 거리에 있는 죽도라고 보고
해군성은 마쓰시마는 울릉도의 명칭이라고 했음
해군성은 울릉도를 마쓰시마, 돌도를 리앙쿠르 락스(량코도)라고 기록
외무성의 와타나베 국장은 이런 사태를 그대로 방치한 것으로 판단
3) 1877 ~ 1880년 점의 일본 측 독도 인식
1877년 - 태정관은 '마쓰시마 = 독도'이고 일본 영토가 아님을 명심하고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결론을 내림
1880년
- '울릉도 = 마쓰시마'이며 '독도 = 리앙쿠르 락스'라는 다른 명칭을 기록
- 이 시점에서는 해군성도 독도를 조선령으로 보고 있었음
1885년
- 태정관이 폐지, 내각 제도로 개편
- 해군성이 붙인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이 오히려 일반에게도 알려지기 시작
- 리앙쿠르 락스라는 명칭은 1849년 프랑스 선박 리앙쿠르호가 동해를 탐방해 독도를 발견해서 붙인 명칭
2. 해군성 수로지에 나타난 독도
1) 해군성 수로부의 '수로지' 작성
1880년 이후 일본 해군성 수로부는 수로지를 작성하기 시작
울릉도 - 마쓰시마로 명기
독도 - 프랑스가 명명한 '리앙쿠르 락스'를 일본식으로 '리얀코르토 열암'으로 번역해 기재
2) 환영수로지(1883)
일본의 해군성 수로부가 처음으로 발행한 수로지는 1883년의 환영수로지 임
환 - 천하, 세계
영 - 바다
=> 세계 바다의 수로지
실제 일본, 조선, 러시아의 동해안 등을 중심으로 수로를 소개
독도를 2권 제2편 <조선동안 및 제도>에 포함시켜 '리앙쿠르 락스'의 일본식 발음인 ' 리얀코르토 열암'로 기록
수로지 기재 내용
- 독도의 발견은 1849년 프랑스
- 역사적으로 독도가 일본에서 '마쓰시마'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무시
1880년 이후, 일본의 해군성 수로부는 독도의 역사를 완전히 망각 or 의도적으로 기재X
3) 조선 수로지(1894,1899)
1894년 - 환영 수로지 다음 1894년 일본 수로부는 조선 수로지 발행
- 제 4편 '조선동안 및 제도'에 독도와 울릉도 포함
- 이 것은 수로부가 독도를 조선 동아넹 속하는 조선 섬으로 인정함을 보여주는 증거
1894년에 제 1판, 1899년에 제2판이 발행
- 독도, 울릉도에 대한 기재는 1판과 같음
- 독도를 조선 동아느이 섬으로 기재함으로 독도가 조선 섬임을 스스로가 다시 확인
4) 일본 수로지 (1897)
일본 해군성 수로부는 1897년 일본 수로지를 발행
1897년 처음 출간된 일본 수로지 4권 제3편
- '본주 북서안'에 대한 기재가 있음
- 독도에 가장 가까운 일본 섬인 오키는 기재 BUT 독도 기재 X
5) 1907.03 발행된 조선수로지
수로지의 독도 기재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07.03년에 발행된 조선수로지로부터 였음
- 1904.11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개칭하기를 원했음
- 1907.03 독도는 아직 일본수로지가 아니라 조선수로지에 기재
항목 이름을 다케시마로 하였음
독도라는 한국 명도 확인, 독도를 조선 동안에 기재
1904.11
- 시마네현이 ' 리얀코르토 열암'의 일본식 이름을 붙이기 위해 오키 도사에게 의견을 물음
- 오키 도사는 울릉도가 마쓰시마이므로 다케시마가 리얀코르토 열암의 명칭에 적합하다고 답
1907.03
- 아직 독도가 일본으로 편입되지는 않았지만 명칭이 '다케시마'가 된 1904 말의 상황을 기재한 것이 1907.03판 조선 수로지
- 출판될 때 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
6) 1907.06에 발행된 일본수로지
- 1907.03에 출간된 조선수로지에 이어 3개월 후인 1907.06 수로부는 일본 수로지를 출간
- 독도가 계속 조선 동해안 소속이었던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독도의 소속을 일본의 '본주 북서안'으로 옮김
- 수로부는 독도에 대한 기재를 조선수로지로부터 일본수로지로 의도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오히려 1905 이전까지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게 된 결과
- 일본 수로지 1907.06에 처음으로 기재된 독도라는 한국 명이 삭제되었다.
메이지 38년(1905) 시마네현 소관으로 편입되었다.
7) 한일 병합(1910) 이후의 일본수로지
1910년
- 한국을 강제합병한 후 일본 수로부는 조선수로지를 없애고 일본 수로지로 통합
1916년 - 일본수로지 4권 제 1편 '본수 및 북서안'에 독도는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기재
"해군성이 수로지를 작성하는 과정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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