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차 - 러일 전쟁 및 한반도
1897 - 고종황제가 대한 제국 선포
1894 ~ 1895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 한반도 장악이 더 쉬워짐
1876.2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을 개항하고, 청나라와의 관계 약화
1895.12 -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후 복귀한 개화파의 서재필은 독립 협회를 창립하여 대한 제국 설립에 도움을 줌
-> 청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이 목표였고, 진정한 독립 국가가 되길 염원
독립 협회 - 입헌 군주제 ->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고종도 허락
서구파 - 전제 군주제 -> 고종과 이간질하여 힙헌 군주제 폐지, 독립 협회 해산
=> 근대화가 멀어지고, 일본이 쉽게 처들어 올 수 있게 되었음
일본이 청일 전쟁 승리 후 요동 반도를 점령했으나 삼국(러, 독, 프)가 반환하라고 요구 하였고(삼국 간섭), 일본은 러시아를 이기기 위한 전쟁 준비를 시작
1902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만주를 점령하자 영일 동맹을 통해 전쟁을 준비
1903.8 -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협상했으나 결렬
1904.1.23 -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러, 일, 미, 영은 무시하고 협상
1904.2.8 러일 전쟁 시작
1904.2.23 - 한일 의정서 체결 강요
한일 의정서 - 일본은 필요시 한국 영토를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물자 보급 창고로 만듦, 타국과 협약을 체결할 수 없게 한다.
1904.3.11 - 한국 주둔군을 창설, 사령부를 서울에 배치하며 이토히로부미 등장
1904.5.18 - 한 러 조약 폐지 강요
1904.8.22 - 한일 협약 강요 (을사 늑약과 비슷한 내용)
고종은 일본의 한국 침탈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밀사 활동을 시작
1905 - 러일 전쟁 중 독도를 편입하여 망루를 설치하려고 함
독도를 주인 없는 땅인 셈으로 치고 망루를 설치하려고 함
내무성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고, 함부로 가져가면 미국과 영국이 들어오기 때문에 가져오는 의견에 반대
외무성은 빨리 편입하여 해저 전선, 망루를 건설하자!
1905.1.28 독도를 주인없는 땅으로 규정하여 시마네 현 오키 섬에 몰래 편입한다.
대한 제국은 독도를 편입한지도 몰랐고, 1906.3 편입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1905.7 - 가츠라 데프트 밀약으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승인했다.
1905.11 - 을사 늑약으로 완벽하게 침략
2주차 - 일본의 침략과 일진회
1905 - 러일 전쟁 중 러시아 내부 분위기도 안 좋아지고, 일본이 동해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이겨서 러시아는 일본 판정 승으로 패배
1905.08 - 러일 전쟁 강화 회의로 포츠머스 회의가 진행
1905.09.04 -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배상금을 받지 못했지만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 하는 것을 인정
1905.11 이토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정부에 을사늑약 체결 강요 = 조약 명칭과 황제의 직인이 없다.
1905.11.15 - 고종을 만나 한국을 위힘받고,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 행사 통보 후 폭언 및 위협
1905.11.17 ~ 18 - 일본군이 덕수궁 위협, 고종은 이토와의 면담 거부
국무 회의 결정 형식으로 조약 체결을 선언
을사 늑약에 대한 대신들의 각종 상소문이 나오고, 고종 또한 인정하지 않음을 말했다.
1905.11.26 - 고종은 헐버트 특별 위원에 긴급 타전하여 조약 무효임을 선언하고, 미국에 전달해 달라고 요구
1905.12.21 - 서울에 통감부 설치, 군 부대 지휘권 장악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니 독도 편입 사실을 숨길 필요 없으니 구두로 편입 사실 전달
-> 한국 정부는 전적으로 사실 무근이라고 말하고, 일본인의 행동을 주시하라고 전달
1906.3 - 을사 오적들도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주장
-> 그러나 을사늑약 체결과 통감부 설치로 제대로 항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의해 침략에 의한 영토 취득은 무효다!
할버트 박사 미국 파견 - 미국 대통령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에 면담 거절
헤이그 평화회의 밀사 사건 - 1907.3 을사늑약 파기를 기도 BUT 거절 당해 회의장 밖에서 이루어짐
-> 이후 고종은 칙서를 공표하여 인민들이 의병을 나설 것을 촉구
-> 7.19 고종은 일본에 의해 퇴위 -> 전국 각지에서 정미 의병이 일어남
1904.08 - 동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정치 결사 '일진회' 결성
오판 : 한국 사회 개혁은 스스로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본과 대등한 합방으로 실현 할 수 있다!
고종 퇴위시키는데 주력하고, 이완용 내각을 성립한 송병준과 친일파 이완용이 있다.
1909.10.26 - 이토히로부미는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역에서 사살
3주차 - 역사적 사실로 본 독도
우산국 -> 돌섬, 석도, 독도 -> 독도
일본에선 송도 -> 랸코도 -> 죽도(다케시마)
배타적 경제 수역 200해리가 결정되고 나서 영유권 주장
17 세기 중반에 영유권 확립했다. 1905 시마네현 오키섬으로 정식 편입했다. 러스크 서한
신라 512년 우산국(울릉도 + 독도)을 귀속했다.
1403 - 태종이 군역을 피해 울릉도로 도망가는 사람을 막기 위해 무인도로 할 것을 명령
1435 - 울릉도에 사는 모든 도민을 육지로 이동, 5년마다 울릉도 수색 진행
1511 - 울릉도 파견 중단 -> 독도에 관한 지식 혼동 일어남
1530 - 신증 동국 여지 승람에서 우산과 울릉을 한 섬으로 보고(후에 공문서를 통해 정정), 독도를 울릉도 서쪽에 그리는 오류도 발생 -> 일본도 동일하게 지리적으로 지도에 오류가 많다.
1756 - 신경준이 강계고, 강계지를 통해 독도, 울릉도 인식 바로 잡음
1770 - 동국문헌에서 정리하여 다시 기재
일본 가장 오래된 역사서(7세기)에서도 독도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고, 8세기 지도인 교키도에서도 북서쪽 경계는 오키섬으로 독도는 없다.
11세기 울릉도를 고려섬으로 알고 있었고, 17세기 정교한 일본 지도를 작성했으나 독도가 또한 없었다.
은주 시청 합기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오나 일본 영토가 아님(1667)
4주차 - 울릉도 분쟁
17세기 초부터 돗토리번의 상인이 우연히 울릉도를 발견해 불법 면허를 통해 울릉도의 자원을 가져감
불완전한 면허였고, 갱신도 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도항, 무인도로 조선이 독도를 영유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
1692 봄 - 안용복이 울릉도에 도해, 일본인 들은 그냥 돌아감
1693 봄 - 일본인과 안용복이 마주쳐 납치 및 울릉도 분쟁 시작
1696.01 - 에도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인이 살지도 않고, 조선에 가까우므로 조선 땅임을 인정,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림
1696.5 - 안용복 등 11명이 일본에 건너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
3년 전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외교 문서를 받았으나 일본 인들이 다시 나타나 오키섬으로 간 것
돗토리 번주와 대마도주에게 조선 땅임을 인정 받고 돌아옴
숙종 실록에도 조선 땅임을 분명히 했다.
일본의 원록각서 속 1696년 오키섬에서의 안용복 취조 기록이 남아 있어 여기서도 울릉도가 조선에 가깝고, 안용복이 상소를 쓰려고 했던 기록이 다 남아있었음
1699 - 조일 간 문서 교환이 끝나 울릉도 분쟁이 끝났다.
5주차 - 일제 탄압
1910.08.29 - 한일 병합 조약의 판포로 일본 지배하에 들어감
-> 국가라는 뜻을 없애기위해 일제는 국호를 바꾸고, 황제도 전하로 바꾸었다.
교육부터 차별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동화 이념이 들어가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교육을 시작한다.
-> 잡거 정책도 이 교육 중 하나로 일본인을 지속적으로 한국에서 살게 장려하였다.
1919.3.1 운동 이후 내지 연장 주의를 강변하여 독립 운동을 좌절 시키려고 함
일신 동조론 - 조선과 한국은 같다고 만들어 한일 병합 정당화를 실시함
단군도 수노사오로 보고, 일본 신이 한국을 만들었다고 왜곡
BUT 최남선이 고조선과 단군을 재 조명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 및 굴복하지 않으려고 함
문화 정치 시대(1919~1931) 조선 총독부는 3.1 독립 운동의 주체를 종교 단체와 사립 학교로 지목하여 폐교, 공립 보통 학교로 바꾸어 사상 교육에 들어감 -> 조선인 학생들에 대해 동화 교육을 실시
총독부는 조선의 지도자를 포섭, 친일 인사로 만드는 정책을 실시하여 동화 교육을 최대화 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친일 단체 : 교풍회, 국민 협회, 대동 동지회, 대정 친목회, 유민회
재한 일본인에 대해 한국 교육을 강화하고, 수당도 지급하였다. - 잡거 정책 중 하나
한국 관리들에게 일본 본토 출장 시찰도 시키며 호감을 보이게 만들려고도 했다.
최남선 - 3.1 독립 운동 선언서를 기초하고, 단군 왕검을 중심으로 한 불함문화권을 주장했으나 친일파로 변신
해방 후 반 민족 행위 처벌법에 처벌을 받고, 잘못도 인정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주장하고, 평화선 설정에 영향력 행사
일본의 식민 지배를 피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유입
3.1운동 이후 임시 정부가 중국에 형성되고, 간도 지역엔 독립군이 모여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둠
만주 지역에 호감을 사기 위해 일제는 자작농 지원, 교육시설, 진료소, 의사나 기술자 파견, 소식지 배부 등을 진행
그러나 관동군의 독단적 행동으로 3개월 만에 만주 지역 점령 BUT 중앙에선 모든 행동 추인
5.15 사건으로 공포 정치 시작
국제 연맹이 만주에 조사단 파견하자 국제 연맹 탈퇴,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도발해 패망의 길 시작
-> 지금도 군대를 만들지 못하고, 한국 승인 없이는 절대로 한반도에 올라올 수 없음
1936.2.26 - 천황 친정을 위해 부패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함
2.27 계엄령이 발령되고, 일왕이 직접 나서기 시작함
천왕의 명령으로 해산하긴 했으나 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중일 전쟁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을 나섬
6주차 - 임시정부
1919.03.01 독립운동 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 - 간도 지역에 많은 항일 무장 조직들이 결성
연통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독립 신문을 발행하며 홍보 활동을 전개했으나 내부적으로 대립이 있었다.
1923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며 세력이 약해졌다.
1925 위임 통치가 필요하다는 이승만이 탄핵 당하며 김구가 수반
1920.06.07 -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 항일 투쟁에 있어서 첫 번째 완전한 승리
1920.10.21 ~ 26 - 홍범도, 이범석,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 승리
러시아 자유시에서 독립군들이 뭉쳐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했으나 통수권 싸움이 있었고, 무장해제 요구 때문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조직적인 활동이 어려워짐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항일 부대는 사라졌다!
임시정부에서 1931 한인 애국단- 김구를 중심으로 일본 요인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는 부대를 결성
1932.04.29 -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다수가 중경상을 입었고, 장제스 총통이 감격하여 임시 정부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1932 - 만주사변 후 괴뢰 만주국을 수립한 일제는 만주 국의 건국 이념을 유교에 입각한 왕도 주의를 결정
1933 - 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를 건국 신으로 받아들이고, 역대 왕들을 신으로 함, 일왕 중심의 황도 주의를 받아들임
일선 동조론과 유사한 만주 속국록(발해가 일본의 조공국이었다.), 일만 동족론(만주 민족과 일본 민족은 동족이다)를 통해 동화 정책을 진행
일본어를 중심으로 5민족을 합치려고 했다.
1937 중일 전쟁이 발발되며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내선 일체가 본격화 되었다.
- 조선인의 군대 동원을 징병제로 바꾸기 위한 수단이며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드는 것이 목표
중일 전쟁도 관동군에 대한 독단적 행동이었다.
1938 -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1940 - 국민 총력 조선 연맹
내선 일체의 철저화와 조선 반도 동포의 황국 신민화를 최대 선결의 목표
아침마다 궁성 요배, 일본 국기 게양, 참배 강요, 황국신민 서사 낭송, 교육, 일어 교육 등등..
1941 - 전쟁이 길어지자 조선 사회에 씨 개념을 도입하여 일본 이름을 가진 조선인을 전쟁애 내보냈고, 혈통을 부정하여 조선인 각 가정을 천황가라는 종가와 연결하였다.(창씨 개명 정책)
조선의 참정권 여부를 둘러싸고 3.1 독립운동 후에 논쟁이 벌어졌다.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간주하지 않고, 내지 연장주의로 일관하여 적당한 시기에 일본 본토에 편입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조선에서도 중의원 선거를 실시해 조선을 대표하는 중의원 선출하려는 운동이 친일 단체인 국민 협회를 시작으로 일어났다.
1938 - 조선 징병제 실시
1944 - 징병제 실시에 따라 일본 내에서 조선인 처우 개선 필요성 주장
1945.4 - 조선에서 중의원 제한 선거 실시 결정
1946.1.1 - 해방되지 않았더라면 일본 본토에 편입되며 선거가 실시
1940.9.17 중화 민국(장제스)의 지원 하 중경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식 군대를 가지게 됨
1940.11 - 중국 시안에 광복군 총 사령부 참정 부서를 만들어 화북 지방 거주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병사 모집
1941.11 - 중화 민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광복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고, 중국인 장교가 파견되어 군이 강화
1941.12.8 - 일본이 미국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 전쟁 발발
1941.12.10 - 임시정부 대일 선전 포고
1945.8 - 김구와 미국 전략 사무국은 광복군의 한국 국내 진입작전에 합의
미국 잠수함을 한반도로 보내 한국 내 요소를 파괴하고 점령하여 무장 봉기를 유도하는 작전
7주차 - 일본의 항복 이후 독도
일제 시대의 독도는 시마네현 오키섬으로 강제 편입 후 1945.8.15까지 일본 행정 하에 있었다.
그러나 침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당한 행위 였으므로 일본에 의한 독도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포츠담 회의와 선언
1945.7.17 ~ 8.2 - 미영소 정상이 일본 항복 후의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
포츠담 선언 - 일본에게 항복을 촉구한 문서로 독도와 관련된 조항은 8조에 있었다.
-> 일본의 주권을 혼슈와 홋카이도, 규슈 및 시고쿠 그리고 연합국이 결정한 작은 섬들에 국한
일본은 8.6, 8.9 두발의 원폭 이후 항복하여 9.2 항복 문서에 조인하여 1952.4.28까지 연합국 점령 하에 놓였다.
1946.1.29 - 연합국 최고 사령부 지령(SCAPIN) 677호로 약간의 주변 지역을 정치 행정상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데 대한 각서를 발표해 일본 정부에 지령 - 여기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
일본은 포츠담 선언 제 8조에 기술된 작은 섬들에 대해 최종적 결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대일 평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을 봐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초안에는 독도를 한국땅이라고 칭하는 문구가 있었으나 후반부 독도에 대한 기재는 사라졌다.
초안 작성은 미 국무성에서 맡아 1947.3.19 ~ 1949.11.2까지 독도는 한국 영토였으나 1949.12.8에는 갑자기 일본 영토로 변경되었다. - 완전히 일본 영토라고 작성을 함
-> 시볼드에게 미국에게 유리할 것이다라고 로비, 설득하여 이루어낸 결과
1949.12.19 - 연합국의 합의서에서 다시 한국 영토로 복귀
BUT 시볼드는 다시 미 국무성에 요구하여 1950.1 일본 영토로 기재됨
-> 일본이 배후에 있다.
1950.8.7 - 1948.12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에 의거한다고 명기하여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인정
1950.6.25 - 한국 전쟁이 시작되며 독도를 한국 영토로 생각함
1950.9.11 - 아직 한국 영토
1950.10.26 - 미 국무성이 독도를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자 연합국이 반대하여 관심사가 되었음
1951.4 - 영 연방은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입장을 고수하여 영국이 독자적 초안을 준비한다.
미국은 일본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
영국은 일본이 자유 진영으로 복귀를 촉구하기 위해 독도를 이름만 뺐지 일본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음
1951.7.19 - 미 국무성에 한국 영토 조항에 독도를 포함해달라고 요청
1951.8.10 - 미 국무성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비밀 문서인 '러스크 서한'보냄
비공개 문서이고 미국만의 견해이다. 즉 많은 견해중 하나이고, 승인 받지 못한 문서로 무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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